누구의 pain point를 해결해주시는 것인가요?
2015년 처음 등장했던 몰리 로보틱스의 TV 광고 영상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아마 그 당시의 스마트홈 관련한 비디오들 중에서 손꼽히게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혹시 못 보셨었다면 아래 한번 감상하시고 시작)
얼마나 신박한가? 레시피를 다운로드하여 알아서 요리를 척척해내고, 남자 친구를 집으로 초대한 데이트에서도 모양 빠지지 않을 정도의 플레이팅에다가 마지막 뒤 정리까지 깔끔하게 해 주니.
아무튼 이러한 인상적인 등장을 반영하듯, 그해 CES 2015 상하이에서 'Best of the Best'로 꼽혔고, 다음 해 1월에는 아랍에미리트에서 열린 AI&Robotics Award에서 최종 결승까지 진출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 인상적인 등장 이후의 높은 기대감으로 다음 소식을 한동안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왔지만, 신박했던 등장을 뒷받침해줄 만한 업데이트는 그 후 몇 년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다른 회사들의 컨셉 영상들이 간혹 있었고, 그중에 삼성이 CES 2020에서 아래 영상과 같은 Bot Chef라는 녀석을 공개했었다.
또한, 이번 CES에 많은 회사들이 인간의 집에서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로봇들을 등장시켰었는데 - 삼성 로봇 (Bot Handy, Bot Care), LG 로봇 (CLOi) - 그중 LG전자의 영상 중에는 CHEFBOT이라는 녀석이 VIPS에서 요리(가 맞나?)를 하는 장면을 연출해서 보여주기도 했다.
몰리 로보틱스가 5년 만에 Launching 영상을 공개했다. (CG로 만든 것이 아니라 실물이 작동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니 아래 감상)
물론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연말 공연(Do you love me?) 만큼 충격으로 뒤통수를 강타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만에 결국 기술과 제품을 완성하고 Launching라는 단어로 나타난 것에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런데, 문득 이 시점에서 몇 년 전 IT 업계 1세대 창업자 출신 투자자 분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도 신나서 이 멋들어진 몰리 로보틱스의 영상들을 보여드렸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해하시기보다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셨고, 이런 얘기들을 덧붙이셨다.
그런데, 이 로봇이 주방에서 왜 필요하죠? 요리는 손맛인데?
정작 주방에서 필요한 것은 이런 역할보다는, 오히려 양파 까고 감자 썰어주는 것과 같이 요리를 위한 재료를 준비하고, 또 조리하고 나면 설거지 포함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해주는 것이다.라는 설명과 함께.
그때의 그 기억을 떠올리며 몰리 로보틱스의 영상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니, 이미 손질되어 깔끔하게 담겨있는 선반 속의 통을 꺼내어 냄비에 붓고, 조리기구들로 그것들을 휘젓는 정도의 영상. 물론, 지금 단계에서 가장 효율/효과적으로 이 로봇의 역할을 보여주기 위해 강조할 부분들을 보여준 것이기는 하겠지만, Launching을 내세운 것 치고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의 상황이 떠올랐다. 아래는 Forbes에 실렸던 기사 중 발췌하여 가져온 그래프이다. 복잡한 듯 하지만 요약해서 간단히 표현하자면,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의 하는 일 중 데이터를 모으고, 그 데이터를 분류/정리하는 작업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79%), 그 일이 제일 하기 싫음(78%). 그래서인지 MLOps(ML 시스템 개발(Dev)과 ML 시스템 운영(Ops)을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ML 엔지니어링 문화 및 방식 @https://lv99.tistory.com/76)를 키워드로 창업하는 스타트업들 중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미션을 수립하는 곳들이 대다수이다 (예, Trifacta: https://www.trifacta.com/)
만약 동일한 질문을 요리사 또는 집에서 요리를 하실 분, 그러니까 몰리 로보틱스의 고객이 되실 분들에게 던져보면 어떤 답변이 대다수일까?
What chefs spend the most time doing?
What's the least enjoyable part of cooking?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는 않았지만, 오늘 저녁 아들을 위해 볶음밥을 만들어주다가도 그냥 답이 무엇일지 명확하게 뇌리에 꽂혔다. 당근, 버섯, 오이, 베이컨 등등을 깨끗이 씻고 춉춉 썰어 준비하며.. 그리고, 다 먹은 식기를 설거지 하거나 식기세척기에 집어넣으며.. 바로 이거지! 이런 걸 해줘야지!
오히려 프라이팬 위에 재료들을 섞고, 올리브유도 넣고 굴소스도 넣고 이것저것 해보는 재미는 말하자면 요리에서는 앙꼬? 마지막에 아들을 위해 깔끔하게 그릇에 담으면서, 맛있어하려나? 한입 떠먹는 것을 기다리며 보는 그 순간은 기대감?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시간들이다.
몰리 로보틱스와 같은 시도들이 계속되는 것은 너무나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다. 나중에 개똥철학 1: 종과 횡의 법칙 연재가 끝나고, 두 번째 개똥철학을 얘기하고 나면 더 깔끔하게 설명되겠지만, 온라인 공간에서만 도움을 주는 AI에서 오프라인/현실 세상의 공간에서 인간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방향으로 AI가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렇기에 이런 시도는 흥미롭고 의미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다만, 이러한 시도가 장기간의 스텔스 모드를 깨뜨리고 Launching이라는 키워드를 달고 나온 것이라면, 요새 스타트업들이 머릿속에 달고 사는 어떤 problem/pain point를 해결하려는 것인지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는 것만큼, 정말 고객의 어떤 pain point를 해결해주는 것인지에 대해 더 심도 있는 고민을 하고 나왔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에 이런 글을 적어보게 된다. 하드웨어 스타트업이다 보니 roll back도 어려우니만큼, 어떻게 lean 하게 그것들을 달성 해나 갈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이 되면 좋겠고..
무려 5년 만의 등장이기도 하거니와, 가격이 "3억 5천만 원"이다 보니...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