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운하 Feb 05. 2022

잠에 빠지다


 방안이 두둥실 떠오를 정도로 극심한 졸음이 쏟아진다. 야간근무 뒤의 혼몽함과 시름을 잊게 하는 더위, 그리고 쉼 없이 들려오는 지루한 매미 소리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권태감 탓인가 여겨진다. 이러한 지경은 사실 한여름 정서의 당연한 풍경으로서 어느 그림에 그려져도 결코 비정상적인 구도가 아니다. 그러니 그냥 혼을 빼놓고 깊은 잠에 취하는 것이 매우 옳다. 

 하지만, 나는 맹렬히 반발한다. 얼음을 입 안에 넣고 폭죽처럼 터트리기도 하고, 선풍기 앞에서 분무기로 온몸에 물을 뿌려 매서운 북풍의 바람결에 노출된 듯한 감각을 연출해보기도 한다. 이 전투력마저도 졸음에 패할 지경이면 팬티 한 장만 걸친 나신의 부끄러움도 잊고 감나무 그늘로 뛰쳐나가 사지를 용틀임 친다. 그리고 수도꼭지의 호수를 통하여 지하의 냉수에 도움을 청하게 마련인데, 도대체 이런 행위를 왜 필요로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거의 병적인 수준이다. 나와 잠 사이에는 필경 신도 어쩌지 못할 은원이 배어있다.


 거의 모든 생명에 잠이 주어졌다는 사실이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다. 강아지나 새끼고양이의 졸음 앞에는 포화가 난무하는 전쟁도 무용지물이다. 너무 귀엽다 못해 기가 막혀 웃음만 나올 뿐이다. 그렇다면, 잠은 평화인가? 틀림없다! 

 군 복무 중이었다. 군기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이등병의 과정을 거치고 난 일등병의 무렵이었고, 저녁 무렵 어떤 일로 인하여 호된 구타와 얼차려를 받은 어느 날이었다. 연방 욱신거리는 몸을 어찌하지 못하고 비애와 증오를 끌어올린 헝클어진 마음으로 깊은 밤 보초를 서고 난 뒤 막사로 돌아왔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달빛의 잔광에 비친 희미한 광채를 띈 얼굴이 있었다. 내게 구타와 얼차려를 준 선임자의 얼굴이자 세상모르게 잠든 얼굴이었다. 

 조금 후 나는 고요한 달빛 비치는 막사 뒤에서 한없이 울었다. 인생의 애잔함에 대한 울음이었고, 비애와 증오로부터 용서를 받은 울음이었다. 그의 얼굴은 말했다. “나도 힘든 하루를 보냈어. 내가 낮에 너에게 무슨 일을 했건 지금 나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 그냥 이렇게 자고 싶어.”

 사실이었다. 그의 얼굴은 인생의 모든 것을 체념한 것처럼 허허벌판에 놓여 있었으며, 어떤 욕망도 분노도 품지 않은 순정의 빛으로 감싸져 있었다. 오직 먼 곳으로 떠나가 그곳 달빛에 영원한 넋처럼 잠들어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를 본 나는 내 자리로 가기 전에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비애와 증오는 나를 용서했고, 나는 그를 용서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 어쩔 수 없는 일처럼 막사 뒤에서 끝끝내 숨죽여 울어야 했다. 그것은 영원한 사랑의 묵시록이기도 했다. 다음날부터 나는 그에게 공손히 웃으며 머리를 조아렸고, 머지않아 그의 표정과 명령어는 한결 부드러워져 내게 평화를 주었다. 


 


 나에게 있어서의 그 체험은 인간의 잠을 틀림없이 숭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악령이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평화 그 자체였다. 지금 물어도 그 사실엔 변화가 없다. 그런데도 악착같이 잠을 쫒아내려는 시도는 어찌 된 일인가. 내겐 도대체 군 복무 중에 있었던 숭고한 평화나 새끼고양이의 졸음에서 오는 즐거운 평화가 필요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잠은 생명의 본능이다. 육체적으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며, 정신적으로는 스스로 청할 수도 있는 잠은 이랬건 저랬건 그 충족으로써 생명의 본분을 지킨다. 여기에 어떤 침해도 있어서는 안 된다. 잠의 섭리를 침해하는 것은 곧 개개인의 생명 선상에 이상기온을 유발시키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 당연히 인류의 생존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일과도 직결된다. 괴로움을 당하는 자와 정신착란을 겪는 자의 충동적 행위에서 질서를 도모할 방법은 애당초 없기 때문이다.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억압의 굴레를 씌우는 길밖에 없는데 이래저래 정상적인 화합은 무시되는 셈이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만약 한번이라도 불면증에 걸려보았거나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이 순간 눈물이 주르르 흐를 정도로 두려움의 자각에 몸서리칠 것이다. 반대로 쏟아지는 졸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보면, 잠은 역시 어둠의 시간에 펼쳐지고 나른한 오후에 펼쳐지는 제 운행대로 내버려 두어야 만이 신성한 생명의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 

 그런데도 잠을 쫒아내려고 발버둥치는 나의 허망한 행동은 연이어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나는 하루 평균 네다섯 시간 정도만의 잠에 익숙해져 있다. 그리곤 아침녘 잠 때문에 지각하는 젊은 동료들에게 조롱하듯 자랑스럽게 말한다. “뭔 잠이 그렇게 많아. 나는 잠을 거의 자지 않아도 이렇게 멀쩡한데... 잠도 버릇이야, 자꾸만 자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

 문제는 그래놓고는 집으로 돌아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데 있다. 대체로 버텨내지만 하루에 적어도 서너 번은 쏟아지는 졸음과의 씨름이 반복된다. 내가 정녕 적은 시간의 잠을 자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까? 설령 인정할 수 있을지라도 그 의미는 무엇일까? 참으로 곤혹스러운 자문이다. 왜냐면, 그 자문의 해답은 결국 나의 치부만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것은 명확하다. 나는 잠의 평화와는 별도로 잠으로 인한 시간의 상실에 대한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잠의 이면과 내 불모의 삶 때문이다. 


 잠은 인생의 삼분의 일 정도를 망각의 공간에 던져버린다. 오늘날 여든의 수명이라지만 실제로는 50여년의 삶밖에 살고 있지 못한 것이다. 당신의 나이가 30대라면 앞으로 50년의 삶이 남은 것이 아니라 기껏 20여년밖에 남아있지 않은 셈이다. 이 사실을 실감하는 당신이라면 아무리 청춘이라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만하다. 잠의 이면엔 이런 사정이 숨어있다. 

 그렇게 삶은 짧아졌는데 내 삶이 치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명의 의미, 인간의 가치를 말하기조차도 부끄러울 정도로 허망하다. 당연히 무언가를 채우고 싶고 이루고 싶다. 그런데 내 나이 벌써 50대를 달려가고 있다. 시간이 없다, 없다. 삶의 세월이 길었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그러나 약초를 채취하는 숱한 산행에서 불로초조차도 만난 적이 없다. 삶의 연장이란 있을 수가 없다. 결국, 기껏해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제한된 시간을 좀 더 많이 활용하는 일뿐이다. 잠이 오면 오는 대로 천연덕스럽게 널브러져 잘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떻게 해서든 잠을 덜 자면서 거기서 얻은 시간으로 내 스스로 만족하는 최소한의 인생의 미덕이라도 쌓아 볼까 하고 용을 써보고 싶은 것이다. 솔직히 이 강박의 어리석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모름지기 인간의 예지는 명료한 의식의 소산물이며, 사회적 성공과 인생의 보람은 그 예지의 소산물이다.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아 하루에도 수십 번 하품하고야 마는 흐리멍덩한 의식으로서는 도무지 실마리조차도 잡지 못할 일이다. 시간이 아까워 잠을 쫒으려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삶의 의식은 몽롱해져 감에도 불구하고 가급적 깨어있는 상태로 무엇 하나라도 해내려는 나는 허망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수렁 같은 이상한 잠에 빠져……, 삶이 끝난 미궁의 세계에서……. 

 솔향기 청량하고 계곡의 맑은 옥수에 내 모습 비치는 날,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끝(1993년 여름에 지음)]



[사진출처] ALL PIXBAY - THANK YOU!

매거진의 이전글 고적을 찾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