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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하 Mar 26. 2022

우산이 쓰기 싫은 남자


 내 거처는 마을 어귀의 밭들 사이에 있고, 길은 소로여서 어디론가 나갔다 오려면 잠깐 동안 소로를 따라 걸어 오고가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널따란 갓길이 있는 찻길과 만나고, 그 갓길에 어디론가 떠나갔다 오곤 하는 내 지프차가 서있다. 

 차는 조금 전 비 내리는 시골길을 달려 사십 리 밖에 있는 읍내시장을 다녀왔다. 그리고 예외 없이 갓길을 제 집인 양 하며 나와 떨어졌다. 지금 우리들 사이엔 굵은 빗줄기가 쇠창살처럼 여전히 내리고 있다. 


 시장에서 사온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참이다. 그런데 내 노화의 건망증이 또 작동되었음을 알게 된다. 전자저울에 넣을 작은 건전지 두 알을 샀는데 깜빡하고 차에 두고 내린 것이다. 조금 후 어떤 작업을 해야 하는데 전자저울을 꼭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러니 별 수 없이 가지러 갈 수밖에 없다. 

 비는 여전히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굵은 빗방울이 갈대밭인 양 무성하다. 그냥 뛰어갔다 오면 옷이 많이 젖게 될 것임은 빤하다. 당연히 우산이 필요하다. 필요한 우산은 손만 뻗으면 잡힐 거리에 걸려있다. 그러나 나는 그 존재에 냉담하다. 빗방울에 주춤하면서도 기어코 우산을 들지 않는다. 그대로 차 있는 곳을 향해 달음박질친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웬만해서는 우산을 잘 쓰지 않는다. 시장을 보면서도 그랬다. 굵은 빗줄기 속을 우산도 없이 마트에 뛰어드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차도에서 마트까지 20여 미터지만, 모두들 차문을 열자마자 우산 먼저 펼쳐드는 게 그들의 일이었다. 그리고 마트로 향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분명 별난 행위를 한 사람이었다. 

 도대체 무슨 청승인지 그렇게 우산이 쓰기 싫다. 우산과 무슨 한 맺힌 사연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지금 생각해 보지만, 딱히 이유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귀찮아서’라는 생각도 떠올려 보지만, 비 맞은 꼴을 정리하기가 더 귀찮았으면 귀찮았지 우산 한번 펼치기가 귀찮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비를 좋아해서’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백발이 성성해 지는 나이에 고의로 비를 맞아가면서 즐기는 것은 도대체 궁상맞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생각이 드니 그것도 아닌 듯하다. 


 우리들 인간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천성’이 있다. 유사한 뜻으로서 한 개인의 인생의 흐름을 끌고 가는 ‘운명’이니 ‘팔자’니 하는 것들, 또는 ‘습성’이니 ‘버릇’이니 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제멋대로 요리될 수 있는 비교적 관대한 동행자들이다. 하지만, 천성만큼은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반려자이다. 그러한 ‘천성’을 제대로 말하자면 ‘완벽한 자아’요, ‘완전한 순리’이다. 어떠한 지식의 전당에서도 해부되지 않는다. 문답도 필요 없다. 쉽게 말해 매우 자연스러운 「그냥 그런 상태」가 ‘천성’이다. 

 내가 우산을 쓰기 싫어하는 것도 달리 이유가 없고 보면, ‘천성’임이 분명하다. 무작정 우산이 쓰기 싫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정이 삶의 중도의 어느 한 순간에 부지불식간에 생겨났다면 또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천성’이 아니다. 어떤 동기를 갖는 ‘습관’이거나, ‘버릇’에 불과하다. 



 물질이 풍족한 요즘의 우산은 별로 쓸데가 없는 십 원짜리 동전처럼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다. 너무 흔한 나머지 아무리 질 좋은 우산일지라도 살대 하나 부러지는 순간 구석 데기에 쳐 박힌다. 그리고 먼지가 않고, 퇴색이 되고, 녹이 쓸다가 그대로 쓰레기장에 버려진다.  

 결국 오랜 옛날의 어린 시절을 말하게 된다. 시골아이였던 어린 내게 있어서 질 좋은 우산은 아예 상상 속의 보물이다. 하긴, 보물이 현실의 눈앞에 나타나기는 했었다. 어머니의 꽃무늬 우산이었다. 아니, 그것은 어머니만의 보석이었다. 그 보석은 어머니만 아는 어딘가에 놓여 있다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니 내가 절대 손댈 수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우산이 펼쳐지는 날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낮이 이었다. 

 “엄마, 비도 안 오는데 왜 우산 쓰고 가? 조금 있다가 비가 오는 거야?”

어머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응? 아니......” 

그리고 질 좋은 우산은 그렇게 멀어져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우산은 햇볕을 가리는 용도의 양산이었다. 


 어린 시절에 우산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대나무로 된 파란 비닐우산인데, 사실 그것도 한참 후의 기억 속에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말하자면, 내가 말할 수 있는 우산은 토란잎이거나, 책 보따리거나, 처마이거나, ‘빨리 달리는 능력’이다. 그 중 무엇을 사용하건 홀딱 젖는 것은 매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어린 나는 결국 ‘비에 젖는 우산’을 쓰고 다닌 셈이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비에 젖었다고 울었다든지, 짜증을 냈다든지, 원망을 했다든지 하는 기억은 맹세코 없다는 점이다. 그저 깔깔대며 좋아했던 기억만이 전부이다. 

 어린 내게 무슨 감성이 있었으며, 어떤 지각이 있었으랴! 그냥 그렇게 좋으면 좋은 것이고, 싫으면 싫은 것! 그런 감정의 상태에서 비를 맞는 것은 ‘그냥 좋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우산을 쓰기 싫은 것은 ‘그냥 싫은 것’이다. 그러니 우산이 쓰기 싫은 것은 분명 내 천성이라고 해두어야겠다. 


 왕복 80미터 정도를 달음박질 하고 오는 동안 결국 흠뻑 젖었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런 소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어디 잠시 뛰어갔다 온 것일 뿐이며, 젖은 옷은 빗방울이 떨어지니까 젖은 것일 뿐이다. 옷을 털며 무심코 바라보게 된 접힌 우산은 내가 영 한심한 모양이다. 상대조차도 하기 싫은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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