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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하 Feb 21. 2024

마음의 냄새

저서 [색의 길] 중에서


   앞집에선 나를 포함하여 누구든 낯선 기척이 있을 때마다 양철지붕에 소나기 퍼붓듯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몸은 개인데, 짖는 소리는 영 고양이 발톱이다. 개와 고양이는 앙숙이 아니던가. 그 앙숙이 한 몸에 있으니 삭풍이 창문 치듯 앙칼지다. 들을 때마다 매번 마음이 긁힌다.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될 줄은 예상 밖이다. 낑낑대던 아기 때는 흰머리오목눈이처럼 누구에게라도 인정될 예쁨과 귀여움의 총아였다. 백설의 순수 속에 박힌 흑진주의 눈동자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첫 대면에서 만남의 기쁨이 넘쳤고, 안아주었고, 쓰다듬었다. 그로써 나의 냄새는 교감 되었을 테고, 다정의 연을 맺은 것으로 생각했다. 한 번 각인되면 영원히 새겨지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인간 후각의 1만 배가 된다는, 냄새로써 암이나 당뇨 같은 인간의 질병까지 찾아낸다는 놀라운 개의 후각을 믿었기 때문이다. 

  착각이었다. 다정의 연은 딱 그 한 때였다. 앞집을 방문할 일이 거의 없는 생활로 인해 서로의 기척은 교류되어도 만남은 거의 단절되었다. 단절되었던 동안 개는 점점 자라 내 생각과 영 다른 본색을 나타냈다. 품종도 치와와 품종임이 드러났다. 그토록 예쁜 어릴 적 모습은 연장되지 않았고, 사나워야 하고 앙칼져야 하는 숙명이 철저히 실현되었다. 작은 몸의 비운을 눈을 부라린 호기로써 메꾸려는 것일까? 주인이 아닌 한, 모든 대상을 향한 적대감이 매번 날카로운 이빨에서 반짝거렸다.

  나의 냄새에 대한 기억도 전혀 없음이 분명했다. 담장 하나를 두고 활동하는 우리 사이의 거리는 멀어야 10여 미터다. 담장 때문에 까치발을 들지 않는 한 서로를 보지 못할 뿐이다. 개의 후각 능력으로 나의 냄새를 맡지 못할 거리가 절대 아니다. 그러나 담장 곁에서 부스럭거리는 내 기척은 영락없이 도둑 기척이 되고야 만다. 금방 주인과 동네방네에 수상한 사람 나타났다고 고자질한다.  

  이웃끼리 이래서야 될 일인가 싶어 친화적으로 되기 위한 노력도 기울여 보았다. 까치발 들고 담장 위로 얼굴 내밀어 눈웃음도 지어보고, 휘파람을 불어가며 손을 흔들어도 보았지만, 당최 늘품이 없다. 간혹 앞집을 방문할 일이 있을 때면 가까이 다가가 친화적인 말과 손짓을 해보지만, 매번 된서리 맞고 멋쩍다. 언어가 개입된 인간 사이가 아닌데다가 소소한 일이니 원망은 없다. 자기 딴에는 최상의 태도인, 저의 세계의 숙명을 그저 인정한다. 물론 뒤돌아서며 못난 놈 한심하게 여기듯 혀를 끌끌 차기는 한다. 날 밉다고 하는 저에게 칭찬하랴.   

       

  적대감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유쾌한 일이 되지 못한다. 앞집 개는 주인과 연루된 소수의 사람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에게 유쾌한 일을 하지 못하는 셈이다. 이는 독재 세력의 행위와 같은 일이다. 독재자를 중심으로 몇몇 권력자들만의 친화적인 세계만을 이룬 채 나머지 모든 국민을 억압과 통제의 영역으로 몰아세우는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주인과 무관하게 자기 혼자서 이런 파행적 구조를 만드는 앞집 개가 딱할 수밖에 없다.   

  그런 구조를 행함으로써 주인에게 마냥 칭찬받는 것도 아니다. 허구한 날 잘못한다는 꾸지람을 듣는다. 좋은 선물을 배달하러 방문하는 집배원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모습이 집배원에게 고까울 리가 없고, 주인은 집배원의 그 불편한 감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 자연스럽게 개에게 화를 내거나 회초리를 들게 마련이다. 자기 소명에 충실했을 뿐인 앞집 개로서는 뜬금없이 체벌당하는 억울한 일이기도 하겠다. 그렇다. 이런 경과는 누굴 원망할 수도 없는 얄궂은 세상사의 경과이다.  

  세상사의 경과는 이해하지만, 천날 만날 앙칼진 소리를 들어야 하는 내 입장으로 돌아와서는, 앞집 개에게 변화가 있기를 소망해 보기도 한다. 특히 그렇게 소망해 보는 이유는, 역시 개의 놀라운 후각을 믿고 있는 탓이다. 개의 후각 능력이 신급 능력을 발휘한 고사는 너무나도 많다. 그러한 고도의 재능이 있는 만큼 선악까지도 분별할 수 있는 혜량을 지닐 수 없을까 기대해 보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일까? 상상이라도 해보자. 

  인간의 신체엔 많은 화합물이 내재되어 있고, 그 화합물의 분자구조는 죄다 다르다. 따라서 모양도 냄새도 다를 것임이 틀림없다. 페로몬 냄새와 도파민 냄새가 같을까? 엔도르핀과 아드레날린의 냄새는 같을까? 슬퍼서 흘리는 눈물의 냄새와 기뻐서 흘리는 눈물의 냄새는 같을까? 화가 나서 거칠게 내뱉는 목소리의 냄새와 사랑이 가득한 감미로운 목소리의 냄새는 같을까? 그와 같이 선한 사람이 풍기는 냄새와 악한 사람이 풍기는 냄새가 같을까? 다를 것이고, 개는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능력에 있어서 사람도 사람 나름이듯이 개도 개 나름이리라. 

  지난날 내 뒷집은 어느 날 문득 자랄 만큼 자란 하얀 백구를 한 마리 데려왔다. 그리고 자기들 마당이 시작되는 곳이자 내가 다니는 길가인 곳에 거처를 마련하여 키우기 시작했다. 내 종아리가 스치는 곳이어서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그 개는 처음부터 나를 경계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챘는지 내게 관대했고 과묵했다. 생면부지에서 곁을 스쳐 가도 빤히 쳐다만 봤을 뿐 짖지도 않았다. 순하고 짖지 않는 개인가도 했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겐 짖었는데 매우 위압적인 우렁찬 목소리를 터트렸다. 내게는 짖지 않는 개를 며칠 스치면서 서서히 정이 들기 시작하자, 저도 정이 들기 시작했는지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렇게 아주 순하게 다정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첫 대면에도 짖지 않았던 백구는 내게서 무슨 냄새를 맡았을까? 자신에게, 또는 주인에게 조금도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감지해 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지금의 앞집 개는 영 다르다. 뒷집 주인이나 앞집 주인이나 모두 나와 다정지간이다. 그들 주인에게 내 마음은 그렇게 똑같이 순하다. 하지만 뒷집 개는 짖지 않았고, 앞집 개는 앙칼지게 짖는다. 두 개가 각기 지닌 성격 탓인지 후각 능력 탓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백구의 태도를 보건대 앞집 개도 사람의 냄새를 심원하게 맡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즉 마음의 냄새를 맡아서 짖을 때는 짖고, 꼬리 칠 때는 치는 현명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는 것이다. 

  그로써 나쁠 일이 없다. 분별하여 짖으니 주인과 집배원에게도 좋고, 개 자신에게도 좋고, 그리고 담장 너머에서 매번 마음이 긁히는 나에게도 좋다. 마음의 냄새를 맡는 혜량! 사실 우리들 인간에게 정녕 필요한 일이지만, 불행히도 우리 인간에게는 그런 전능한 신급 능력은 없는 듯하다. 어쩌겠는가. 앞집 개의 개과천선에 기대어 꿈이라도 꾸어 본다. 



[사진] ALL PIXBAY -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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