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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May 02. 2024

내 세계가 막을 내릴 때 나는 그런 얼굴을 했다

비정기적 우편함 


청춘을 다루는 영화를 보면 자꾸 몸을 비비 꼬게 된다. 너절한 모습의 청춘을 가감 없이 보여줘서 공감성 수치 탓에 얼굴이 달아올라 보았고, 턱도 없이 아름답기만 한 성공을 그린 스크린 아래서 콧방귀를 뀌어본 적 있다면, 이 뒤틀리는 감각을 무어라 짚어낼 수 있을지 알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라 이름 붙이면 좋을까.


실패를 다룬 영화는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정정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실패가 싫은 게 아니다. 내가 보기 싫었던 것은 결국은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환경이나 욕심, 그런 거였던 것 같다. 오롯이 자신만을 이유로 포기하는 그런 것들 말고, 등 떠밀려 사라져야 하는 시간들. 떠나야할 때를 아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말은 떠나는 자의 마음은 하나도 헤아리지 않은 이기적인 아름다움이 아닐까. 그런 고민들을 하며 다시 이 영화를 꺼냈다. 

잔인하고 이성적인 정답.


<프란시스 하>를 극장에서 본 건 2021년 여름이다. 다르게 말하면 서울극장이 문을 닫던 해다. 서울극장이 문을 닫으면서 상영회를 열었다. 나는 여러 영화 중에 하필 <프란시스 하>를 골랐다. 영화가 시작하고 내내 아찔했다. 한숨을 몇 번이나 쉬었는지 모른다. 유쾌한 캐릭터의 추락이 달갑지 않았고, 불안정한 삶에 따르는 어쩔 수 없는 허세와 부풀림이 눈물이 찔끔 날 만큼 고통스러웠다.


2021년의 나는 일을 하고 있었고, 내 일을 사랑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랬다. 내 의지로 쓸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없었고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매분 매초 입증해야 하는 삶의 치열함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내 삶도, “제 직업이요? 설명하기 힘들어요. 진짜 하고 싶은 일이긴 한데, 진짜로 하고 있진 않거든요”의 연장선이었던 셈이다. 그 말을 할 때 프란시스의 표정이 어떤 표정인지 자꾸 잊어버려서 몇 번이고 영화를 다시 돌렸다. 프란시스의 표정은 사실 제대로 읽기 힘들다. 체념인지 부끄러워하는 건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지 영화를 볼 때마다 내가 그를 어떻게 읽고 싶은지가 달라져서. 그냥 그건 내 모습을 읽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2021년의 나는 불안정하고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운 3불의 세계에 갇혀있었다. 나는 유쾌하게 뛰지도 못했고 대부분의 고통을 담배와 술과 커피에 녹여서 대충 삼키기 바빴다. 나는 많이 울었는데 프란시스는 울지도 않았다. 그냥 건조한 표정으로 집세를 내야 해서 영화를 보기 힘들다고 이야기할 뿐.


한국뿐 아니라 뉴욕의 청년도 처한 주소지는 같은가 보다. 프란시스는 무주택자에 빳빳한 미래도 없다. 프란시스를 떠돌게 만드는 이유도 결국은 빈곤이다. 집세를 같이 내던 친구 소피가 그를 떠나 가정을 이루기로 결심했고 그에 따라 프란시스도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가야 한다. 둘이 살던 집에 그대로 살면 좋으련만 그만한 집세를 낼 여유가 없다. 당장 다음 달에 일이 있냐 없냐에 따라 내 생활이 달라지는데 세금 환급을 받았다며 밥을 사겠다는 모습, ATM을 찾아 달리다가 넘어진 프란시스를 보면서 숨이 턱 막혔다.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면서 보지 않아도 되는데도, 현실이 몰아세우는 것들이 여과 없이 도달하니 공격처럼 느껴졌다. 너무 현실적이다, 너무 현실적이야. 충동적으로 파리에 도착해서 시차 적응 실패로 파리의 낮은 다 흘려보내고 느지막한 저녁에 눈을 떠서는 결국 떠돌다, 에펠탑을 보고 또 떠돌다가 뉴욕으로 돌아온다. 낭비라는 단어가 막을 새 없이 튀어나온다.  


다시, 이것은 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프란시스의 일상의 균열은 결국 소피와의 이별에서 시작한다. 서로가 최고의 우선순위였지만 한순간에 홀로 남겨진다. 자신이 모르는 소피의 일상이 생기고, 누군가에게서 소피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우리는 이제 친구가 아닌 것만 같은 상황이 벌어질 때 프란시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한 표정으로 굳어버린다. 공연에 설 수 없게 됐을 때도, 집에서 나가야 했을 때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프란시스가 소피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혼란스러워하고 화를 낸다.



제가 원하는 어떤 순간이 있어요.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 서로의 호감을 쉽게 눈치채잖아요. 하지만 파티에서 각자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있고 웃고 있는 상황에 눈을 돌리다가 서로에게 시선이 멈추는 거예요. 불순한 의도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이번 생에 그 사람이 내 사람이라서. 언젠가 끝날 인생이라 재밌고 슬프기도 하지만 거기엔 비밀스러운 세계가 존재하고 있어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우리만 아는 세계.




매번 프란시스의 ‘우리만 아는 세계’를 열어주는 것은 소피였다. 그리고 그 세계를 닫히게 한 것도 소피였다. 한 사람이 내 인생에 그토록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절절한가.


프란시스는 자신의 침대를 정리하는 법이 없는 사람으로 나온다. 프란시스가 마련한 핑계는 “알잖아, 나 바쁜 거.” 프란시스가 침대 정리를 하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정리해줄 수 있는 소피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침대는 둘이 마침내 이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잔뜩 취해 프란시스가 머물던 기숙사 방을 두드린 소피가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할 때, 그리고 하루의 변덕을 거두고 다시 프란시스를 떠날 때. 그때였다 둘의 세계가 완전히 끝나고 프란시스의 균열이 멈춘 것은. 프란시스는 소피를 잡으러 맨 발로 뛰어나왔고 한참 그 맨 발을 물끄러미 보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토록 지지부진하고 괴롭다. 내가 상처받는지도 모를 정도로 막연하고 맹목적일 때가 있는 사랑을 더이상, 감히 선택하지 못하는 것. 그게 어른이라면 되고 싶지 않다고 외쳤지만 결국 나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 섣불리 곁을 주진 못하면서 곁을 달라 외치는. 

프란시스는 무책임하게 꿈을 꾸라고 권하지 않는다. 비집고 들어간 사회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다. 프란시스는 더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지는 않지만 여전히 길거리를 뛰어다니고, 안무를 짜기 위해 기꺼이 맨발이 된다. 이 영화를 몇 번 봤지만 프란시스의 행동을 ‘포기’라고 느낀 적은 없다. 진짜 포기는 아예 무용이라는, 예술이라는 선택지를 없애는 것을 의미하니까. 프란시스는 자기가 꾸던 꿈 근처에서 또 다른 발판을 마련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


영화는 내내 누군가의 빛바랜 추억처럼 흑백으로 진행된다. 노아 바움벡 감독 역시 이러한 연출의 이유로 ‘즉각적인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불러오는 노스탤지어는 각각 다를 것이다. 불안정하던 취업 준비 시기, 20대의 빈곤, 결혼에 따라 달라지는 각자의 사회. 멀어진 친구나 사랑.


하루하루는 결국 지나간 과거이자 나의 노스탤지어다. 내 일기는 ‘표류’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정해진 집 없이 표류하던 프란시스처럼 나 역시도 떠내려가는 것인지 표류하는 것인지 모른 채 둥둥 떠돌아다니고 있다.  


프란시스 하의 풀네임은 Frances Haliday. 우편함에 들어가지 않는 이름을 프란시스는 가볍게 집어던진다. 그렇게 우편함에 꽂힌 이름은 프란시스 하. 여기가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아도, 공간은 만들면 된다. 나 하나 누울 자리, 나 하나 서 있을 곳 없을까. 모든 단계가 하나의 졸업이고 처음 겪는 과정이라 고되지만, 어쨌든 다...지나간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내가 선택한 것들은 옳은 모습일 것이다. 인생의 굴곡을 겪을 때 본 영화라 굴곡이 생길 때마다 이 요상한 흑백영화를 자꾸 들추게 되는데, 이번에도 어지간한 위로를 받고 간다. 눈물로 얼룩지고 술에 취한 밤들이 어떤 날의 노스탤지어가 될지 조금은 궁금해진다.


덧. 얼마 전에는 D 선배가 “수빈 씨도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봐야 하는 타입이잖아. 그러니 그냥 해요. 고민하지 말고” 라는 말을 했다. 내 삶을 관통하는 태도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가끔 놀랍고 반갑다. 그래서 이번 도전도 똥일지, 된장일지 몰라 찬찬히 알아볼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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