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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노 Jan 27. 2023

[Review] 당신과 함께 견딘다는 것

연극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을 춘다'

지난 2021년, 서울극장이 폐관했다. 그 소식에 오랜만에 그곳에 방문해서 마지막 영화를 봤다. 더운 날씨였지만 사람들은 많았다. 몇 주 뒤면 영영 사라질 그곳을 조금이나마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였을까. 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저마다의 마지막 영화와 함께 서울극장의 엔딩을 함께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들에게 서울극장은 어떤 영화였을까.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는 누구의 이름이 올라가 있을까.


내 경우에는 그녀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대학 선후배였던 우리는 영화제작동아리에서 처음 만나, 영화를 만들며 가까워졌다. 같이 <스파이브릿지>라는 영화를 보러 가는 것으로 썸을 시작했다. 극장이라곤 CGV, 메가박스밖에 모르던 나를 서울극장에 처음 데려간 건 그녀였다. 사귀는 동안 서울극장은 꽤 자주 우리의 데이트 장소가 되어 주었다. 이제는 여기서 무슨 영화를 봤는지 헷갈릴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잠시나마 그때 그 시절을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준 서울극장이 참 고마웠다. 그때 함께 있어줘서, 떠난 후에도 용케 지금까지 버텨줘서.


물론 아쉽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좋아하던 극장이 망한 경험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지난해(2020년)엔 고향에 있던 극장 하나가 사라졌다. 내 생애 첫 번째 극장이었다. 그곳에서 가족들과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을 보았었다. TV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쏟아질 듯한 거대한 화면과 극장 안의 독특한 분위기는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나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곳이 사라졌다니. 누군가 내 어린 시절을 통째로 훔쳐 간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망한 극장을 배경으로 한다는 연극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연극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린 듯이 티켓을 신청했다.  


출처 - 극단 수


연극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을 춘다>는 폐관을 앞둔 극장 ‘레인보우시네마’를 배경으로 극장의 마지막 상영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극중 인물들은 낡은 필름을 꺼내며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을 만나 정겹게 수다를 떨기도 한다. 마치 솜인형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작품이다.


하지만 극장의 첫 번째 주인이자 조씨 집안의 할아버지인 병식의 입에서 오래전 사라졌던 둘째 손자 ‘원식’의 이름이 나오자 분위기는 싸늘해진다. 손자인 원우는 정리를 핑계로 밖으로 나가 버리고, 사람 좋게 웃고 있던 아들 한수는 더 이상 원식의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며 아버지에게 일갈한다. 마냥 화목해 보이기만 하던 레인보우씨네마 사람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인 병식이 자꾸만 ‘원식’을 자꾸 입에 올리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현대 사회에서 과거는 극복의 대상이다. 가끔씩 그리워할 순 있어도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진 않는다. 나아가는 것이 머무는 것보다 가치있게 여겨지는 시대에 지나간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못하고 그대로 고인다. 서서히 먼지가 쌓이고,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죽어간다.


그런데 연극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과거에 얽매여 있다. 삶은 그런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과거에 얽매인 사람들의 현재는 피곤하다. 원식이 사라진 후, 여태껏 그때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씨 집안의 3대 사이엔 불편한 기류와 알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한다(실제로 원우는 원식이 사라진 후 집을 떠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극장의 영사기사인 수영은 과거 어떤 사건을 계기로 마음의 상처를 얻고, 인형탈을 쓴 채 살아간다. 하물며 싹싹 맞은 극장 직원조차 전 남자친구를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레인보우시네마는 일종의 도피처였다. 왜냐하면 그곳이 극장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다. 필름 속에 기록된 건 과거의 시간이다. 극장은 그 시간을 현재에 다시 재생한다. 고여 있던 시간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흐를 수 있도록,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만든다. 


어린 시절, 정숙의 어머니는 태풍을 무서워하는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함께 밤새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현재 치매에 걸린 그녀의 어머니는 밥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소한 이유로 딸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그럴 때마다 정숙은 극장을 찾았다. 극장의 구멍 난 천장을 보며 어머니와 함께 태풍을 이겨냈던 추억을 떠올렸다. 그 추억에 웃고 울었다. 그렇게 다시 현재를 마주할 힘을 찾았다.


출처 - 극단 수


하지만 이 연극의 핵심은 단순히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에 있지 않다. 중요한 건 그 과거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영화가 예술로서 지닌 두 번째 특징이 발휘된다.


영화의 역사에서는 최초의 영화를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에 파리의 한 카페에서 상영한 ‘열차의 도착’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움직이는 사진인 ‘동영상’의 개념은 이미 그전부터 있었다. 이를 상영하는 기계도 이미 발명되었었다.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토스코프가 바로 그것이다. 키네토스코프가 발명된 게 1889년이니 뤼미에르 형제보다 6년은 더 빨랐다. 


하지만 우리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상영한 영상을 최초의 영화라고 부르진 않는다. 왜냐하면 에디슨과 뤼미에르 형제 사이엔 간단하면서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로 영상을 보기 위해선 사람들이 직접 기계에 눈을 갖다 대고 화면을 각자 들여다봐야 한다. 반면 뤼미에르 형제는 거대한 스크린 위에 투사된 영상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이 최초의 영화라는 타이틀을 뤼미에르 형제가 가져가게 된 이유다. 다시 말해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의 예술이기도 하다.


연극의 클라이맥스는 태풍이 치는 밤에 시작된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현재를 피해 사람들은 극장으로 모여들었다. 마침 정전 때문에 불도 꺼졌다. 꼭 영화가 시작되기 전 깜깜한 상영관 내부를 보는 것 같다.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레인보우시네마’의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신의 과거를 꺼내기 시작한다. 저마다의 영화를 상영한다.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 ‘한수’는 그동안 묵혀둘 수밖에 없었던 아픈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람들 앞에서 손자 ‘원우’는 도망치듯 집을 떠난 후 돌아올 수 없었던 사정을 고백했다. 사람들 앞에서 할아버지 ‘병식’은 미처 원식의 사정을 들여다보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했고, 영사기사 ‘수영’은 그저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고 모두에게 사과했다. 


출처 - 극단 수


물론 과거를 끄집어 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눈다고 해서 극중 인물들의 삶이 드라마틱 하게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태풍을 견뎠다고 해서 극장의 폐관이 없던 일이 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대신 서로의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함께 슬퍼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견딘다는 것. 폐업 같이 우울한 단어에 ‘축’이란 글자를 붙일 수 있는 여유는 어쩌면 바로 여기서 나온 게 아니었을까.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3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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