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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노 Jul 26. 2023

[Review] 나의 플레이리스트

도서 '이루마 데뷔 20주년 기념 악보집'

 

 

(1) Sometime  Someone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연주가 시작된다. 오선지에 새겨진 발자국을 길잡이로 삼아 피아노의 선율을 좇았다. 손가락이 나도 모르게 들썩였다. 새로운 악보를 손에 넣은 건 굉장히 오랜만이다. 본가에 있는 낡은 내 피아노가 떠올랐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사촌 누나에게 선물했던 그 피아노는 돌고 돌아 내게 왔다. 한때는 그 피아노와 함께 먹고 살 수 있기를 꿈꿨다. 물론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지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나를 10년 전 그때로 데려다 놓았다. 아직도 우리 집 책꽂이 구석에는 그때 썼던 습작들이 모인 악보집이 하나 있다. 잠시 고민하다 악보집을 꺼냈다. 소복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책장을 펼치자 빛바랜 음표들이 제모습을 수줍게 드러냈다. 시선을 따라 음표에 갇혀 고여 있던 노래들이 쏟아졌다. 그때 그 시간들이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2) River Flows In You


강물은 일정하게 흐르지 않는다. 멀리서 봤을 땐 잔잔하게 보여도 실제로 보트 위에서 물살을 맞아 보면 군데군데 격랑이 숨어 있다. 중간에 바위라도 있으며 더 세차게 굽이 친다. 'River Flows In You'는 그런 강물의 기묘한 리듬을 청각으로 생생하게 재현한다. 분명 똑같은 4분의 4박자인데 어떤 때는 빨라졌다가, 어떤 때는 느려지기도 하면서 청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Kiss The Rain'과 더불어 이루마의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River Flows In You'는 학창 시절에 피아노 좀 친다는 친구들의 3대 플레이리스트였다(나머지 자리는 히사이시 조와 <말할 수 없는 비밀>의 OST가 각각 차지했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게 처음 이 악보를 선물한 사람은 같은 실용음악학원을 다녔던 Y였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정도 많았고, 전공은 보컬이었다. 당시 나는 전공이 작곡이었기 때문에 나와 Y는 접점이랄 게 없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내 연습실로 찾아온 Y는 본인의 연습을 도와달라고 했었다. 당황스러운 첫 만남이었지만 어쨌든 그때를 계기로 우리는 빠르게 친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내 연습실에 찾아온 Y는 뜬금없이 악보집을 건넸다. 본인이 피아노 연습을 할 때 쓰던 것들이라는데 보컬 전공인 본인보다 내게 더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거기 들어있던 게 River Flows In You의 악보였다. 매번 남이 치던 걸 듣기만 하다가 직접 그 선율의 당사자가 되니 묘한 쾌감이 들었다. 


그 후로 종종 연습이 막힐 때마다 나는 Y가 준 악보들을 뒤적였다. 아마 그때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알았다면 나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가뜩이나 연습해야 할 곡들이 산더미인데 땡땡이나 치고 앉았으니. 그러나 그땐 그 작은 일탈이 나에겐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현재 Y가 준 악보집은 본가의 피아노 의자 바닥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 아쉽게도 Y와의 연락은 끊긴 지 오래다. 먼저 연락을 끊은 건 내 쪽이었다. 한창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을 때였다. 입시를 진행할수록 나의 재능이 다른 이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다는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저찌 대학의 작곡과에 진학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 행운의 끝이 될 것만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실을 자각하게 해준 건 Y의 존재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한 살로 삼수생이었다. 중간중간 서울에 오디션도 보러 다녔지만 좋은 소식은 없었다. 물론 스물한 살이 많은 나이는 아니다. 그러나 당시 새롭게 데뷔하던 가수들이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이었던 걸 감안하면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애초에 대학의 보컬과에 진학한다고, 혹은 오디션에 붙는다고 바로 가수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약 없는 연습생 생활이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세상엔 뛰어난 가수가, 뛰어난 작곡가가 너무 많았다. 우리는 둔재였고 예술의 현실은 그런 우리들을 기다려줄 만큼 느긋하지 않았다.


수험생 생활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불안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 무렵 집안에 안 좋은 일이 터졌고, 그걸 명분 삼아 나는 학원을 그만두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나의 실패를 인정한 순간이었다. 단순히 시험을 망친 수준이 아니었다. 이 행동으로 나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로 건반 앞에 앉아본 게 손에 꼽을 정도인 것 같다. Y와의 연락이 끊긴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나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중도 포기했다는 사실이 그 시절엔 참 부끄러웠다.


그 후로 10년이 지났다. 그때 Y가 내게 선물했던 악보가 지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Y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직도 도전하며 살고 있으려나. 아니면 나처럼 체념했으려나. 이제는 벌써 30대가 되었을 그가 문득 보고 싶어졌다. 



(3) If I Could See You Again


작곡노트의 마지막 장에는 제목도, 가사도 없는 노래가 하나 있다. 오래 전 누군가와 함께 만들기로 약속했던 노래였다. 그 사람에게는 내 작곡노트도 보여줬었다(그걸 본 사람은 가족을 포함해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그만큼 당시 그 사람은 내게 꽤 특별한 사람이었다. 


둘만 있는 카페에서 내 노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후 그 사람이 내뱉은 첫 마디는 자기도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물론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있는 것도, 악보를 보는 방법도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그저 감상평 중 하나이겠거니 싶었다. '악보도 볼 줄 모르면서?' 내가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다. '같이 하면 되지. 음악은 네가 만들어. 가사는 내가 쓸게'


다음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다시 노트를 펼쳤다. 오랜만의 작업이었고, 자취방엔 피아노도 없어서 작업 속도는 당연히 더뎠다. 그래도 열심히 만들었다. 코드를 짜고 멜로디도 몇 번이나 갈아 엎었다. 그 사이 몇 개의 계절이 지나갔다. 그저 새하얗던 오선지에도 연필 자국들이 늘어났다.


허나 변한 건 계절과 오선지만은 아니었다. 우리의 관계에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정확히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참다못한 그 사람은 등을 보였고, 나는 손을 놓았다. 그날 이후 나는 바쁘게 살았다(일부러 더 그랬다). 음악 작업도 당연히 중단되었다. 작업을 재개한 건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어쨌거나 마무리는 짓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가사는 여전히 쓰지 못했다. 몇 번 시도하긴 했지만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게 이루지 못했던 꿈들 위로 또 하나의 ‘미결’이 더해졌다.


영화 <라라랜드>에서 오랜만에 재회한 미아와 세바스찬은 과거를 떠올렸다. 흥미로운 점은 그 과거의 문법이 평서문이 아닌 가정법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때 내가 당신과 함께 파리로 갔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If I Could See You Again. 만약 그때 내가 당신의 손을 놓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우리가 여전히 특별한 사이였다면 어땠을까.   


 

(4) It's Your Day


노래를 만드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그냥 시를 쓴다고 생각하면 된다. 시를 쓸 때 중요한 건 운율이다. 운율을 만드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가장 좋은 건 역시 반복을 주는 것이다. 단어가 되었든, 문장이 되었든 일정한 패턴의 반복은 랩의 라임처럼 리듬과 운율을 만든다.


작곡 역시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노래는 하나의 모티브에서 출발한다(그 모티브는 멜로디일 수도, 코드일수도, 리듬일 수도 있다). 모티브의 길이는 천차만별이다. 한 마디가 될 수도, 한 악절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 모티브를 어떻게 반복할지에 있다.


가령 '(C코드)도-미-솔-'로 이어지는 하나의 모티브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작곡가에겐 이 모티브를 가지고 놀 수 있는 여러 선택지가 있다. 모티브를 그대로 반복(도-미-솔-도-미-솔-) 하는 방법도 있고, 모티브를 역으로 재생하는(솔-미-도-솔-미-도-) 방법도 있다. 음 하나를 바꾸는 방법도(도-미-솔-시-미-솔-시♭-미-솔-) 있다. 음을 쪼개는 것(도-레미솔-)도 가능하다. 멜로디의 전개 방식은 유지한 채 리듬이나 코드를 바꾸는 방법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반복되는 모티브들 사이에 새로운 모티브를 넣어 반전이나 강조를 줄 수도 있다(흔히 말하는 싸비(사실 코러스가 더 바람직한 표현이다)나 브릿지가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악보를 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반복되는 모티브와 함께 그 모티브를 변주하는 작은 아이디어들이 보인다. 하나의 개울에 여러 작은 도랑이 모여 큰 강이 되듯, 하나의 모티브에 작은 아이디어가 모이면 노래가 된다. 흔히 사람들은 작곡을 한다고 하면 머릿속에 번뜩이는 악상이 떠올라 그 자리에서 한 곡을 순식간에 완성하는 모습을 생각하지만 이는 실제 작곡가들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물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다. 정말 부러운 사람들). 흔히 말하는 악상이란 하나의 모티브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거기에 어떤 아이디어들을 채워 변주할지는 철저히 노력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 노력에 의해 노래는 만들어진다.


이쯤에서 갑자기 웬 작곡 강의냐고 물을 수 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작곡을 하는 과정이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흔히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특히 분업화가 극에 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누군가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로 대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우리의 노력이 보잘것 없거나, 심지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무의미 할까?


“이 세상이 나라는 하찮은 조각으로도 움직이는 거야.” 웹툰 <마음의 숙제>를 보면 주인공 이경은 이렇게 말한다. 다시 말해 모티브에 더하는 작은 아이디어는 작곡가의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가 당장 듣고 있는 노래에서는 불가결하다. 마찬가지로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고 해서, 당신이 해왔던 일들과 노력의 가치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준 당신 덕분에 세상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니 박수받을 만하고, 그러니 존중받을 만하다. 잊지 말자. 당신의 하루는 오늘도 빛났다(It’s your day).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5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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