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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노 Feb 09. 2024

[Review] 94년의 은희와 97년의 훈이

영화 '검은 소년'

“스무 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 <스무 살>에 나오는 문장이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땐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 뜻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세계에서 비좁은 현실로 들어선다는 것. 어렸을 땐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는 게 많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허나 실제로 마주한 어른의 삶은 할 수 없는 것들을 발견하고, 이를 인정하고 체념하는 시간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돌아보지 않기’를 버릇처럼 중얼거렸다. 돌아보는 순간 후회와 쓰라린 상처만 떠올릴 테니. 지나간 것들을 돌이킬 순 없다. 그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니까. 지나간 것들로 인해 빚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다. 책임을 다하며 견디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들어선 극장에서 97년의 훈이를 만났다.  



영화 <검은 소년>은 고등학생 훈의 성장통을 그리고 있다. 낯선 소재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전에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제작했던 <파수꾼>, <죄 많은 소녀>도 따지고 보면 비슷한 테마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를 보며 가장 많이 떠올린 작품은 오히려 <벌새>였다.


영화의 첫 장면을 떠올린다. <벌새>는 엄마의 심부름을 다녀온 은희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은희의 노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엄마는 답이 없다. 순간 자신이 버려진 건가 싶었던 은희를 엄마를 부르며 더욱 절박하게 문을 두드렸다. <검은 소년>은 고된 하루를 보낸 듯 누더기가 된 교복을 입은 훈이 공중전화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훈 역시 은희처럼 절박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루한 신호음만 이어질 뿐,  상대방은 끝내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은희와 훈이 모두 상대방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 누군가 전화를 받아주기 전까지. 이렇듯 노크와 통화는 상대방의 리액션을 필요로 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전까지 은희와 훈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디론가 떠날 수도 없다. 그저 무력하게, 기다림의 공백을 묵묵히 견딜 수밖에 없다.  



이러한 첫 장면의 분위기는 영화 속에서 은희와 훈이가 처한 상황과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우선 두 사람 모두 불우한 가족사를 갖고 있다. 은희는 언니, 오빠만 편애하는 부모님으로부터 사실상 학대를 당하고 있다. 훈의 부모는 현재 별거 중이다. 시한폭탄처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아버지 밑에서 훈은 늘 두려워하고 있다(자세히 설명해 주진 않지만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그 일로 인해 훈이는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했었고,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망가졌다. 은희의 경우,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절친으로부터 배신당했다. 살가웠던 후배는 다음 학기가 되자 그녀를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며 무시했다. 한문 선생님 영지만이 유일하게 은희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으나 그녀 역시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은희의 곁을 떠났다. 한편 훈의 경우 언제부턴가 반의 일진인 기철로부터 트러블을 겪고 있다. 절친 병태는 사실은 네가 나보다 불쌍해 보여서 너랑 친하게 지낸 거였다는 말로 그의 마음을 후벼팠고, 유일한 안식처였던 문학 동아리에서도 쫓겨났다.


흥미로운 점은 두 영화 모두 시대적 배경을 영화에 깊숙하게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벌새>에는 94년의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검은 소년>에는 97년의 IMF가 있다. 그렇다면 <검은 소년>에서 IMF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는 영화 전반에 깔린 무력한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성실하게 일하던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시기. 그 시기에 훈이와 그의 주변 인물들은 깊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훈의 부모님은 걱정 말라며, 너 자신만 생각하라며 그를 안심시키지만 본인들의 삶조차 제대로 지탱하지 못해 버거워하고 있다. 화목해 보이던 병태의 가족 역시 병태 아버지의 실직으로 인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다. 문학 동아리에서 만난 연희 또한 현실의 무언가로 인해 답답함을 느끼고 있고, 이를 문학과 그래피티를 통해 해소했다. 마냥 강해 보이던 기철 역시 ‘너도 날 무시하는 거냐’는 대사를 통해 나름대로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훈에게 글쓰기는 유일한 창구였다. 그가 글쓰기에 매달렸던 이유는 간단하다. 훈의 무력감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현실에서 왔다(이는 영화의 첫 장면과도 이어진다). 그러나 글 안에서 훈은 자유로웠다. 그는 그 세계의 창조주였으니까. 창조주는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글로 인해 훈은 안식처였던 문학 동아리에서 쫓겨났다. 부모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탄이 났고, 병태마저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런 훈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건 그가 가장 혐오했던 기철뿐이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 <벌새> 中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전부 다 내 탓 같아.”  - <검은 소년> 中


<벌새>에서 은희는 언니와 함께 새벽에 몰래 끊어진 다리를 보러 갔다. 그 무렵 은희의 관계는 완전히 망가졌다. 아빠가 휘두른 주먹으로 인해 고막까지 터졌다. 이런 상황에서 끊어진 다리는 그녀의 관계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행복했던 그 시절로, 영지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무너진 다리를 뒤로하고 묵묵히 나아가는 것. 그러고 보니 <검은 소년>의 병태도 훈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나는 졸업하면 돈을 벌어야 해. 이유는 모르겠는데 우리 집이 망해 버렸대…그러니까 너도 버텨. 버티면서 살아.” 


이 성장담엔 판타지가 거세되어 있다. 성장은 희망보단 오기에 더 가깝기 때문이리라. 이제 훈은 선택해야 했다. 다시 글 속으로 기어들어갈 건지, 기철이 내민 손을 잡을 것인지. 아버지를 따라 강남으로 이사를 갈 건지, 어머니와 함께 이곳을 떠날 건지. 지금 이 순간을 잘 이겨낸다고 해서 훈에게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 미래를 위해 선택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언제까지고 누군가 전화를 받기만을 기다릴 순 없으니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성장이라는 건, 어른이 되어 간다는 건 체념하는 법을, 덮어두고 돌아서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돌아선 이후의 현실을 버티는 법을, 버티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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