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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노 Oct 20. 2024

[Review] 가능성의 실험실

전시 '장 줄리앙의 종이세상'


전시 ‘장 줄리앙의 종이세상’이 오는 2025년 3월 30일까지 서울 ‘퍼블릭가산 퍼블릭홀’에서 열린다.


작가 ‘장 줄리앙’은 세심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일상 속 사소한 순간부터 사회적 이슈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본인만의 시선으로 표현한다. 이니스프리, 파리바게뜨 등 국내 브랜드와도 여러 번 협업한 이력이 있어 국내에서도 제법 익숙한 작가다. 이번 <장 줄리앙의 종이세상> 전시에서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페이퍼 피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향해 따스한 유머와 더불어 날카로운 코멘트를 던진다.


전시는 크게 3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1부(“페이버 팩토리”) 공간에 들어서면 거대한 공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중앙에는 커다란 컨베이어 벨트가 놓여 있고, 페이퍼 피플들은 이제 막 태어난 종이 인형에 색을 칠하고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천장에는 작업이 완료된 종이 인형들이 기계에 매달려 어딘가로 향했고, 공장의 벽면에는 갖가지 동물 그림들이  마치 설계도처럼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과연 이곳은 어떤 공간일까. 페이퍼 피플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공간의 규모에 압도 당하면서도 호기심은 기어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1부 공간을 모두 둘러보아도 해소되지 않았다. 각각의 사물들은 그저 존재할 뿐, 텍스트 형태의 설명은 거의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는 풀리지 않은 의문들을 품고 2부 공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2부(“페이퍼 정글”)에 들어서면 이번엔 커다란 종이 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나온 설명에 따르면 페이퍼 피플들은 뱀의 몸에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했다고 한다. 과연 그 말대로 뱀의 귀여운 얼굴을 지나 구불구불한 몸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 우주가 탄생한 빅뱅의 순간부터 지구에 최초로 생명체가 등장한 순간, 공룡들의 시대와 인간의 등장, 4대 문명과 중세의 교회를 넘어 대항해시대와 시민 혁명, 양차 세계대전과 현대 사회에 이르는 역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몇 십억 년의 역사를 이렇게 표현한 끈기와 아이디어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허나 뱀의 꼬리에 가까워질수록 그림의 분위기는 점차 암울해졌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름다웠던 도시는 환경오염과 전쟁으로 폐허가 됐고, 이에 인간들은 지구를 떠나 우주로 향했다.


찝찝한 마음을 안고 걸음을 이어나갔다. 뱀의 몸 반대편으로 향하자 다른 그림이 펼쳐졌다. 이번 그림은 꼬리에서 시작해 머리로 나아갔다. 누군가의 낙서에서 태어난 최초의 페이퍼 피플은 주변에 있던 펜과 가위로 자신과 같은 종이 인형들을 만들었다. 이후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책상 위를 벗어나 바다를 건너 어느 이름 모를 대륙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자신들만의 역사를 시작했다. 


재미있는 건 페이퍼 피플들이 인간의 역사를 모방한다는 것이었다. 페이퍼 피플들은 인간처럼 옷을 입고(펜으로 자신의 몸에 옷을 그렸다), 수염을 길렀고(이것 역시 펜으로 그렸다). 인간이 그랬던 것처럼 농사를 짓고, 마을을 만들고, 나아가 도시를 건설했다. 이 작업들을 위해서는 더 많은 페이퍼 피플이 필요했고, 이에 그들은 공장을 지어 자신의 동족들을 찍어냈다. 동물들도 함께 만들었다.


그러니까 1부에서 보았던 거대한 공장은 이러한 히스토리에서 비롯된 장소였던 것이다. 전시관의 구조 상 3부를 관람하기 위해선 다시 1부 공간을 통과해야 했다. 역사를 이해하니 이곳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올리버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의 오프닝 장면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소설 속 기준 ‘야만인’이 되는 걸까. 호기심이 떠난 빈자리를 기묘한 감정이 채우는 걸 실시간으로 체감하며 3부 공간으로 나아갔다.  



3부(“페이퍼 시티”)는 실제 도시를 모티브로 한 공간으로 카페, 도서관, 영화관, 꽃집 등 여러 건물과 편의 시설들을 종이로 구현했다. 이곳에서 페이퍼 피플들은 실제 사람처럼 영화를 보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등 하루하루를 영위했다. 그래서일까. 모든 전시 공간을 통틀어 볼거리도 가장 많고, 생기도 넘쳐흘렀다(포토존으로도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을 뿐).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장소는 갤러리였다. 이곳엔 페이퍼 피플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물론 그 그림들은 사실 장 줄리앙의 다른 작품들이었다). 흥미로운 건 이 그림들의 피사체가 페이퍼 피플이 아닌 실제 사람이라는 것이다. 페이퍼 피플들은 예술에서도 인간을 모방하고 있었다. 일례로 상점의 진열대엔 각종 상품과 함께 책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프랑켄슈타인>이었다. 실제 소설 속 크리처가 처음엔 인간을 동경하고 닮으려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꽤나 의미심장한 배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시를 통해 ‘장 줄리앙’이 말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3부 “페이퍼 시티”를 떠난 나는 다시 종이 뱀을 보러 갔다. 머리에서 꼬리로 향한 인간의 이야기와 다르게 꼬리에서 머리로 향하는 페이퍼 피플의 이야기는 열린 결말로 끝이 났다. 그들의 역사는 아직 현재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인간을 모방한 일종의 대체 역사였다.  



종이라는 건 참 기묘한 재료다. 종이 위의 예술은 기본적으로 2차원의 예술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3차원의 예술도 가능하다. 종이접기가 대표적인 예다. 페이퍼 피플 역시 시작은 누군가의 낙서(2차원)였지만 지금은 분명한 입체감을 지닌 3차원의 존재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차원의 벽을 뛰어넘은 것이다. 


뱀의 몸에 새겨진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의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한계를 뛰어넘는 커다란 가능성이 필요했다.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페이퍼 피플은 태어날 때부터 차원을 뛰어넘었던,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런 그들이 인류와 유사한 대체 역사를 살아감으로써 보여줄지도 모르는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을까. 반목 끝에 별을 떠나야 했던 인간과 다르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저 도시(페이퍼 시티)는 그 가능성의 실험 현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페이퍼 피플들의 미래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 실마리가 궁금하다면 오는 2025년 3월 30일까지 서울 ‘퍼블릭가산 퍼블릭홀’에 방문해 보자.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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