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둔재 Sep 27. 2022

[문이과 예체능 통합형 둔재] 카투사와 유레카

머리에 경종을 울리게 한 군대에서의 2년, 그리고 새로운 도전

2014년 논산훈련소에 입대한 나는 5주 간의 기초 군사 훈련을 마치고, 카투사 후반기 교육에 참여하게 되었다. 카투사는 월 단위로 입소가 이루어지는데, 나는 14년도 05월 입대했기에 14-05 기수로 KTA(KATUSA Training Academy) 교육에 참여한 셈이다.


논산훈련소 부터 함께 하긴 했지만, KTA로 이동하고 나니 이제 정말 카투사 교육생들만 남게 되었고 새삼 세상에 대단하고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반기 교육 기간 동안 했던 것 같다. 명문대생들이 즐비했던 것은 놀랍지도 않았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또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주위에는 내가 주눅들 만한 것들 투성이었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14-05 기수 KTA 하반기 교육을 전체 1등으로 수료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게 대단한건 전혀 아니긴 하다. 내가 영어나 다른 것을 특별히 잘해서 1등으로 수료를 한 건 아니었고 KTA가 수료 시 등수를 사격 + 체력 + 영어 점수를 합산해 메기게 되는데 내가 사격 + 체력 점수가 좋은데 영어가 평범하게 나와 "점수 상"으로는 1등이 된 셈이었다.


뭐, 이렇다보니 1등 수료를 했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격지심으로 가득했던 3주를 마무리하는 결과가 1등이었다는 점은 좋았다. 그리고 왠지 모를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유학파들이 즐비하던 집단에서 성과를 냈다는 기분도 들었고 말이다. 어그로 성 제목을 짓는다면 "영어 한 마디도 못하던 토종이 카투사 전체 1등으로 수료한 썰" 정도로 지어보고 싶긴 하다. 아, 가장 좋았던 건 아무래도 1등 수료생에게 주어진 포상 휴가였다. 해당 휴가는 나중에 요긴하게 잘 써먹었다.


아무튼 카투사는 다른 특기생들과 마찬가지로 하반기 교육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게 되는데 이 때 지원을 통해 배치를 받을 수도 있고, 임의 배치를 받을 수도 있다. 나는 당시 영어를 단 한 마디도 못하는 상태로 입대를 했기 때문에 카투사 생활을 통해 가장 얻고 가야했던 것은 다름 아닌 영어 능력 습득이었다. 그래서 입대 전 주워 들은 지식에 따라 가장 영어를 많이 쓸 수 밖에 없다고 하던 전투병에 지원을 해 배치를 받게 되었다.


동두천 전투병 생활은 생각했던 것 만큼 힘들기도 했지만, 내가 얻고자 했던 영어 능력을 고취하는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재밌었던 일화가 있는데, 입대 당시 우리 소대장으로 계시던 소위가 순환 근무로 인해 한국을 떠나게 되었을 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소위가 "너 왜 이제는 말하냐? 나는 너가 되게 말이 없는 애인줄 알았다." 라고 하길래, 나는 "나 이전까지 영어 한 마디도 못해서 그냥 가만히 있었던 거다." 라고 말했다. 소위는 너털 웃음을 지으며 "그렇다면 너 카투사에서 영어 많이 공부해갈 수 있겠다, 잘됐네." 라며 격려를 해주었다.


실제로 카투사 복무를 통해 영어 실력을 많이 향상시킬 수 있었던 나는 상병 때에는 분대장 역할을 수행하며, 미군 리더십들과 소통을 할 일도 많이 만들어 더 많은 성장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당시 우리 중대 행보관으로 부임한 일등상사가 라틴계 미국인이었는데, 발음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무서운 사람이었어서 소통하면서 진땀을 엄청나게 흘려댔던 기억도 난다.


네 인생은 너가 선택하는거지. 가족들의 생각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

아무튼 카투사를 통해 여러 좋은 기회와 경험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중 가장 기억에 남고 나에게 울림을 준 사건이 있다. 분대장을 달기 전, 새벽에 미군 일병과 함께 불침번을 서야 했던 적이 있다. Motley라는 흑인 일병이었는데, 곧 본국으로 돌아갈 예정의 사병이었다.


미국은 모병제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병들이 굉장히 어린 편에 속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입대를 하는 경우가 가장 많기에 이등병, 일병은 20대 초반의 친구들이다. 그래서 사고도 많이 치고, 안정적인 수입도 어린 나이에 얻게 되기 때문에 게임, 술 등에 과소비하는 친구들이 굉장히 많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그래서 군생활 초기에 어린 사병 친구들과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나는 태생적으로 겁이 많고, 사고에 연루되는게 싫어 어린 사병 친구들과 거리를 두고 가정이 있는 20대 후반-30대 초반 친구들이랑 주로 어울렸다. 그런데 Motley라는 친구가 불침번을 함께 선 날 이러한 내 선입견을 크게 깨뜨려 주었다.


당시 상병이 된 만큼, 전역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나는 진로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하기 시작했다. 여러 다른 길을 모색해볼까도 고민했고, 스포츠 관련 학습을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이어 나갔다. 이 때, 내 고민에 가장 많은 제약을 걸게 된 건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가족들이 내가 고민을 하는 것에 직접적인 제동을 걸었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워낙 당당하고, 당연하게 여기며 말해왔던 "스포츠 에이전트" 라는 진로를 포기하게 되었을 때,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설득할지가 막막했다. 그래서 다른 고민들을 쉽사리 더 뻗어나갈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곧 본국으로 떠나고, 머지 않은 미래에 전역을 할 것이라는 Motley에게 나는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Motley는 트럭 드라이버가 될 것이라 말했다. 트럭 드라이버가 되어 소소하게 운송업을 하다가, 자기 회사를 차리고 싶다는 말을 했다. 여담으로 나는 트럭 드라이버가 미국에서 대중적인 직업이라는 사실을 당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제 막 21살 정도 되었던 Motley가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트럭 드라이버를 하며, 일을 하면서도 가족과 떨어져 있을거라는 이야기를 듣다 궁금해진 나는 물었다. "그러면 가족들은 어떻게 하고? 가족들이 너 보고 싶어하지 않겠어?" Motley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이제 성인이고, 가족들은 오히려 내가 독립해서 잘 살기를 원하지, 계속 함께 사는 것을 원하지는 않아."


새삼 고등학교 시절 사회문화 시간에 배운 서구권의 가족 형태와 가족관이 체감되었다. 나는 "나도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데, 내가 가족 신경을 너무 많이 써. 가족들한테 실망을 하게 될 결정을 할까봐 걱정이야." 라고 당시 겪고 있던 고민을 털어 놓았고, Motley는 "네 인생은 너가 선택하는거지. 가족들의 생각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라는 이야기를 내게 건네주었다.


머리가 멍해지고,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나를 독립적인 개체로 바라보고,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선택을 하는게 가족들에게도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어린 사병들을 마냥 어린 사고뭉치로 바라보고 있던 내 오만함에 엄청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전역을 마친 나는, 학교에 복학하지 않고 새로운 전공을 찾아 나서기 위해 난데 없이 편입 학원에 등록하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문이과 예체능 통합형 둔재] 20대까지의 기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