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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ooje 주제 Feb 13. 2019

0204 (2) 여전한 온기, 아일랜드조르바

주제 in 제주 그림일기 - 게스트하우스 스텝으로 두 달 살기

아일랜드조르바의 댕유자에이드


0204 월요일 / 흐린 뒤 맑음 / 제주살이 14일 차



   재작년 여름 처음 만난 평대리. 제주에서 꼬박 삼 일간 단편 영화를 찍고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들른 동네였다. 뚜벅이 여행자의 상징과 같은 커다란 캐리어를 이끌고 도착한 아일랜드조르바는 처음이지만 왠지 낯설지 않았다. 내부를 채우는 건 에어컨 바람 대신 덜덜거리는 선풍기 바람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에어컨이 고장 난 날이었다.) 무더위를 뚫고 들어선 곳에서 나를 반기는 게 얼음같이 찬 바람이 아닌, 뜨듯한 바람이라는 사실은 생각보다 싫지 않았다. 아일랜드조르바라는 이 공간과 그 미지근한 온기를 품은 바람이 너무나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을까. 더위, 일, 사람들 그 모든 것에 지쳐있던 나를 어쩐지 포근하게 감싸주는 듯한 바람이었다. LP판에선 역시나 처음이지만 익숙한 느낌의 재즈 음악이 들려왔다. 바닥에 앉아 낮은 나무 테이블에 기대 음악을 들었다. 이윽고 나온 댕유자에이드를 들고, 다시 출발.


   평대의 골목골목을 그저 걸었다. 에이드엔 기다란 로즈마리가 꽂혀있었는데, 이렇게 거의 한 줄기를 꽂아 주는 곳은 처음이라 깜짝 놀랐다. 이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타고 로즈마리향이 코 끝에 닿았다. 그 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 향기를 흠뻑 들이쉬며 평대 곳곳에 묻어나는 여름의 색깔들을 만끽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 속에서도, 오직 이 여름 한가운데 내가 서있다는 사실에 벅차올랐다. 유자에이드는 내가 여태껏 먹어봤던 것들 중 가장 진하고 향기로웠다. 그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코 끝에 로즈마리가 닿아있는 것 같다. 마치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 냄새가 과거로의 매개체가 되어 주는 것처럼, 나도 그 시간으로 돌아갈 것만 같다.


   결국 난 그 날의 향기를 잊지 못해 아일랜드조르바를 다시 찾은 것이었다. 계절은 한여름에서 한겨울이, 스물넷의 대학생은 스물여섯의 취준생이 되었으며, 길었던 갈색 머리는 검은색 숏컷으로 변했으나 공간만은 그대로였다. 댕유자 에이드를 마시자 재작년 여름으로 돌아가는 그런 소설 같은 일은 물론 일어나지 않았지만, 에이드의 효과도 한결같았다. 힘이 잔뜩 들어간 어깨를 내려주는 맛. 지쳤으면 쉬어도 괜찮다고 말 걸어주는 그런 맛. 내게 아일랜드조르바는, 여전히 특별하다. 스물넷에 느꼈던 행복을 스물여섯에 똑같이 느낄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일 거다. 이 행복 오래 느낄 수 있게, 이 공간이 오래도록 그대로 여기 있어주었으면 해.






댕유자에이드와 드립커피


재작년에도 있었던 반가운 청록색 간판. 그리웠어!


아일랜드조르바에선 LP판도 왠지 느리게 돌아가는 것 같다.


사실 '그리스인조르바'는 내 인생책이다. (tmi)


* 평대리 아일랜드조르바  -  오늘의 주제 in 제주 플레이스

: 영업시간 10:30~18:00 화, 수요일 휴무

: 댕유자에이드와 드립커피가 유명한 카페. 수요미식회에도 나왔었다고!

: 너무 덥거나 춥지 않다면 댕유자에이드를 테이크아웃해 평대 바다를 보며, 또는 동네를 산책하며 마시길 추천.



여러분들도 특별한 추억이 담긴 카페가 있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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