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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옥 Feb 05. 2022

12. 열한 번 이사한 재활 난민

 가입자 수만 17만 명이 넘는 뇌질환 커뮤니티에는 오늘도 누군가가 뇌졸중에 걸려 혹은 뇌에 문제가 생겨 카페에 가입하게 되었다는 제목의 글들이 올라올 것이다.


‘갑자기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119에 실려가셨어요.’

‘저희 아들이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서 깨어나지 않고 있어요.’

‘제 아내가 아기를 낳고 뇌출혈로 의식을 잃었습니다. 깨어날 수 있을까요?’


 마음의 여유가 없어 일일이 댓글을 달진 못했지만 난 그분들이 어떤 심정 일지 감히 짐작을 할 수는 있었다.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갑자기 나에게 일어났을 때의 그 감정은 너무나 상투적인 말이지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를 것이다. 보호자들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이런 병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 자체만으로도 눈앞이 깜깜해지기 마련인데 이때 우물쭈물하다간 병원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엄마는 첫 병원에서 중환자실에 있었던 기간을 포함해 복원술까지 모두 마치는 데 2개월 보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교수님은 복원술 이후 한 주 정도의 타이트한 기간 동안 엄마가 회복하는 것을 확인했고, 그 후 엄마는 바로 다른 병원으로 이동해야 했다. 나는 엄마를 간병하러 병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의료진들로부터 병원을 곧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던 때라 콧줄과 목관이 아직 그대로 있는 환자를 왜 계속 병원에서 내보내려고 하는지 나는 정확히 이해를 못 했다. 나중에 전원을 종용하는 의료진들을 못 이겨 검색을 해보니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전원 압박’ 문제에 나도 처해 있었다.


 상급종합병원에 환자가 뇌졸중 문제로 입원을 해 환자의 수술이 끝나고, 내과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면 2개월 정도 후에는 병원에서 환자를 무조건 쫓아낸다는 것이다. 콧줄, 기관절개관 심지어 산소 호흡기를 하는 환자도 그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상급종합병원의 경우 환자 회전율을 높여 보다 많은 급성기 환자들의 치료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까닭에 보험공단에서 병원에 지급하는 의료 수가는 환자의 입원 기간이 장기화될수록 줄어들었다. 의료진들도 병원의 수익과 관련한 이유로 자신이 맡은 환자가 장기간 입원을 하게 될 경우 다른 누군가에게 압박을 받게 되는 형태였다.  


 뇌질환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를 알아낸 우리 가족도 빠르게 움직였다고 생각했지만 서울 권역에 있는 상급종합병원들의 평균 대기 기간은 2~3개월이었다. 아빠가 엄마의 현재 상태에 대한 정보가 담긴 진료 의뢰서를 들고 큰 병원들을 찾아 헤맸지만 엄마가 첫 번째 병원에서 바로 이동할 수 있는 병원은 없었다. 엄마가 재활 치료를 제일 열심히 받아야 하는 시기에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엄마를 부산의 한 요양병원으로 잠시 모셔야 했다.


 요양병원으로 전원 했을 때 엄마의 담당의가 진료 의뢰서를 보며 나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어머님은 투석까지 하셔서, 지금 어머님 몸 상태라면 어떤 응급 상황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아요. 특히 투석을 받다 돌아가시는 분들이 1년에 몇 분은 계시거든요. 연명 치료에 동의하시나요?”


 담당한 환자의 보호자를 처음 마주한 상황에서 치료 방향에 대한 설명 대신 엄마에게 곧 무슨 상황이라도 생길 것처럼 이야기하는 의사 선생님의 말이 상당히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물론 병원 입원 시 절차상의 질문이라고 하지만 맥락 없이 선생님이 툭 던지는 말에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나에게 이 병원에서는 엄마의 재활이나 차도에 있어서 큰 기대를 하지 말라고 말을 하는 듯했다. 담당의와 대면한 이후 나는 다른 상급병원에서 하루빨리 연락이 오기를 더 간절히 기도했고, 다행히 엄마는 요양병원으로 전원을 한 후 7일 만에 다른 상급병원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엄마는 장기간 입원이 가능한 재활 전문 병원에 입원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고, 목관과 콧줄, 팔로 투석하는 문제도 해결해야 했기에 큰 병원들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의 상급병원은 재활 환자들에게 4주 정도의 입원 기간만 주었기에 병원에 입원을 하면 바로 다음 병원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뇌졸중 환자의 경우 발병하고 2년이 지나면 치료 횟수도 하루에 3회 정도로 줄어들고, 상급 병원은 아예 재활 환자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상황이기에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환자들의 경우 최후에는 목관, 콧줄 혹은 뱃줄, 소변줄, 산소 호흡기 등을 모두 가지고 집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요양병원에서 7일간 머무르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아빠는 상급병원의 입원장을 받는 일에  박차를 가했고 울산과 서울을  달에  번은 오가며 엄마와 나의 ‘4 보금자리 구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아빠의 노력 끝에 경남 권역에서 2개의 대학병원 그리고 1개의 요양병원을 거쳐 엄마는 재활 환자 보호자들이  가고 싶어 한다는 서울의 S병원에 입원할  있었다.


 엄마와 나도 뉴스에서만 들었던 재활 난민이 되었다.   동안 무려 열한 번의 이사를 하며 나는 우리나라 재활 의료 체계의  실정에 실망하지 않을  없었다. 내가 실망을 한들 어쩌겠는가? 우리 가족은 엄마가 보다 나은 치료를 받기를 원했고, 거대한 병원의 수많은 침대들   개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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