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옥 Mar 20. 2022

15. 연분홍색 모자를 쓴 오월의 소녀

 서울에 위치한 S 병원은 전국 각지에서 아픈 사람들은 모두 온 것 마냥 하루 종일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병원 로고가 있는 옷을 입고 있는 환자들과 외래 환자들이 엄마와 나를 스쳐 지나갔다. 하루 평균 병원 내 유동 인구가 3만~4만 명까지 된다고 하니 엄마와 병원을 몇 분만 돌아다녀도 몇백 명은 마주친 셈이었다. 엄마와 병원 안과 그 근처를 돌아다니다 보면 여태까지 병원에 갇혀 의료진만 만났던 엄마가 바깥세상과 조금이나마 더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코로나19로 여전히 세상은 시끄러웠지만 kf마스크를 쓰고 엄마와 나는 S 병원 구석구석을 함께 누볐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가처럼 엄마의 왼쪽 머리 부위에는 머리카락이 많이 나지 않았다. 수술 부위 근처를 제외한 부분엔 머리카락이 꽤나 많이 올라와서 상대적으로 수술 부위는 더 도드라져 보였다. 누가 보아도 엄마가 개두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수술 자국이 선명했다. 엄마 뒤에서 휠체어를 밀며 끔찍했던 수술의 흔적을 볼 때마다 내 신경이 거슬리긴 했지만 별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엄마가 입으로 음식을 먹게 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나는 엄마의 수술 자국에까지 큰 관심을 둘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며, 대학교 강의를 나가며 학생들을 마주했던 엄마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사치스러운 옷을 많이 사들이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는 TPO에 맞게 깔끔하게 갖추어 입는 것을 즐겼다. 특히나 모자는 엄마가 즐겨하는 패션 아이템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였을까. S 병원 내의 기념품 가게를 지나가고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왼쪽 팔을 흔들며 어디론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처음엔 기념품 가게 입구에 진열되어있는 커다란 곰 인형을 가리키는 것인 줄 알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곰 인형 사드릴까요?”란 내 물음에 엄마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내가 잘못 이해해도 한참 잘못 이해했다는 표정이었다. 엄마가 다시 한차례 왼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어디론가 가리켜 보였다. 엄마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겨 다시 보니 엄마의 손가락은 곰 인형 옆에 위치한 모자걸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엄마, 모자 사고 싶은 거 맞아요?”라고 물었더니 엄마는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엄마 뇌에 저장되어 있던 기억들은 많이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모자를 좋아하던 엄마의 취향은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다소 좁아 보이는 기념품 가게 안으로 나는 휠체어를 조심히 밀고 들어갔다. 항암 치료를 받는 환자들을 위한 모자부터 벙거지 모양의 모자, 심지어 병원에서 아무도 사지 않을 것처럼 생긴 챙이 넓은 밀짚모자도 있었다.      


 본인의 취향이 까다로운 엄마에게 어떤 모자를 권해야 할지 몰라 항암 치료를 하는 환자들을 위한 두건 형태의 모자를 건네 드렸다. 다시 엄마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번엔 두건 형태의 모자가 아닌 빨간 머리 앤이 쓸 것처럼 생긴 챙이 있는 모자를 엄마에게 건네보았다. 이것 역시 아니었다. 그리고 몇 개의 모자를 더 권했지만 다 실패였다. 가게 주인아주머니에게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가게에서 나왔다.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또다시 엄마는 왼손을 힘차게 흔들며 나를 멈춰 세웠다. 엄마는 가게 앞에 진열되어 있던 모자걸이에 걸린 연분홍색 벙거지 모자를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가리켰다.


 나는 다시 기념품 가게로 엄마와 함께 들어갔다. 방금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나를 주인아주머니가 쳐다보았다.

 “엄마가 원하시는 게 있는데 제가 이해를 못 했어요. 엄마가 써보고 싶었던 모자가 저 연분홍색 모자였어요. 그래서 다른 모자는 다 싫다고 하셨나 봐요.”라고 겸연쩍게 말했다.

 사실 내 생각도 100% 신뢰는 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그 연분홍색 모자를 건네기 전까지는.     


 나는 엄마에게 연분홍색 모자를 건넸고, 엄마는 거울을 보여달라는 의미로 기념품 가게 안 전신 거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울 앞에 도착한 엄마는 모자를 쓴 본인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에게 모자를 주었다. 처음부터 엄마는 이 모자를 원했는데 표현할 길이 손짓과 ‘끄덕끄덕’, ‘도리도리’밖에 없어서 내가 이해하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엄마의 마음을 빨리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엄마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이 연분홍색 모자를 구매하고 싶다고 표현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50,000원의 돈을 쓰면서 이렇게 기뻤던 적이 언제였을까 하고 떠올려 보았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고, 설령 있다 한들 그 순간보다 감정이 벅차오르진 않았을 것이다.


 엄마도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거울에 혹은 매끄러운 벽면에 비쳐 보이는 엄마의 모습을 항상 본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양산의 B 병원에 머무를 때, 옆 보호자님이 나에게 넌지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 정도면 지금 다 이해하고 계신다. 우리 엄마는 의식이 없어도 이렇게 얼굴을 광나게 해 드리는데 자기도 이런 거 엄마한테 좀 발라 드려야 좋아하시지. 엄마도 여자인데.” 엄마는 평소에도 화장품 특유의 끈적함을 싫어하셨기에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화장을 하는 날이 적었다. 그 보호자님의 말씀에 대충 맞장구치고 넘기긴 했는데 그제야 깨달았다. 화장에 관심이 없으셨을 뿐이지 엄마는 옷을 차려입는 것을 즐기는 분이란 것을.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까까머리 엄마는 연분홍색 벙거지 모자 아이템 하나로 인해 소녀로 거듭났다. 마스크로 콧줄까지 보이지 않으니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진작에 모자를 사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던 내가 한심할 정도로 엄마가 예뻤다. 당장이라도 병원 밖으로 나가 엄마랑 소풍을 가고 싶어졌다. 엄마가 이맘때쯤 좋아하는 하늘 빛깔의 수국과 너무나도 잘 어울릴 것 같은 연분홍색 모자였다. F.E.S. 치료를 받으며 생각에 잠긴 엄마의 모습을 보며 언젠가 거제도로 함께 수국 향기를 맡으러 갈 날을 꿈꾸어 보았다.




첫 글부터 보기

매거진의 이전글 14. 앉기, 서기 그리고 걷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