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공생, 로스쿨에 도전하다 (7)
로입 과정이 어느덧 엔드 게임에 들어섰다. 보통 지금 시기를 Post-LEET 이하 '포릿'이라 칭한다. (1) 학교를 골라서, (2) 원서를 접수하고, (3) 면접을 보고, (4) 합격 통보를 받으면 된다. 이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될 부분은 (2)에서 장문의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과정과 (3)에서 면접을 준비하는 과정 두 가지로 정리된다. 원서 접수는 다음주기 때문에 나는 현재 자기소개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나는 공대생"치고는" 글을 잘 쓴다고 자부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로스쿨을 지원할 생각조차 안 했을 것이다. 과학고를 다닐 때 '인문 주간'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때 행사로 했던 인문학 소논문 쓰기 대회에서 수상한 적이 있다. 회사를 다닐 때는 기술 블로그 글을 작성하고 나에게 첨삭을 받는 사람이 많았다. 브런치 작가 자격도 한 번의 시도로 성공했다. 비록, 주로 쓰는 글이 설명문인 만큼 문단에 오를 깜냥은 안 되지만, 소속된 집단 내에서는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다는 특징 때문에 글로 주목받는 일이 많아졌고, 그것이 다시 글쓰기에 대한 열의로 환원되는 일이 잦다 보니 어쨌든 내 마음속에서는 '나는 글을 잘 써'라는 에고가 자리 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소개서에 대해서는 별 걱정은 없었다. 난 로스쿨에 가고 싶었기에 스펙을 쌓아 온 게 아니라, 개발자로서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는데 자꾸 법률과 부딪치다 보니 '이럴 거면 로스쿨 지원해 봐?'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요는 "나"와 "로스쿨"을 억지로 엮는 창작의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었고, 로스쿨을 지원하기로 마음먹은 시점에 이미 자소서를 어떤 스토리로 전개할지 계산이 끝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소서를 쓰기 시작하면서 "문과"의 위압감에 눌리기 시작했다. 공대생은 로스쿨 지원자 중에는 소수에 불과하다. 독특하다는 것은 장점이지만, 안정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레퍼런스가 없다는 점은 생각보다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근본적으로는 과고-공대-IT 테크를 탄 공돌이다. 아무리 인문대학을 복수 전공했고 인문 교양 수업을 많이 들어왔다고 한들 이방인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주변 인물들도 죄다 IT와 연관이 있었다. 순혈 문과이신 법대 교수님께서 내 글을 보고 당황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글은 많은 사람에게 읽힐수록 좋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대학에 입학할 때 그랬듯 이번에도 원서 지원에 앞서 주변 사람들 몇몇에게 어차피 자기소개서 피드백을 받을 생각이었다. 앞선 불안을 느낀 나는 자소서 피드백을 누구한테 어떻게 받을 것인지, 그 구체적인 전략을 먼저 고민해 보기로 했다.
나는 글을 퇴고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정신력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감히 "내 글을 읽고 피드백을 남겨줘"라고 부탁할 자신이 없었다. 하물며 로스쿨 자소서는 한 학교당 5천~6천 자에 달한다. 요령이 없으면 읽는 데에만 10분을 넘어가기 쉽다. 게다가 피드백을 주는 입장에서는 "피드백은 글보다 좋은 퀄리티여야 한다"는 책임감이 부여되고, 하지만 글쓰기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좋은 기준이란 없기 때문에, '틀린 피드백을 할까 봐' 내지는 '피드백 때문에 교수님한테 감점당하는 자기소개서를 쓰게 만들까 봐' 부담되기까지 한다.
다른 사람한테 부담되는 일을 시킬 때, 가장 편한 수단은 돈일 것이다. 자본주의에 절여진 나는 자소서 첨삭에 대한 적정(?) 시장가를 1시간 기준 5~10만 원선으로 잡았다. 내가 과외를 해 줄 때 얼마를 받고 싶은지를 기준으로 대충 판단한 것이다. 그다음 내가 자기소개서 작성에 지불할 용의가 있는 최대 예산을, 5명을 곱한 50만 원 상당으로 잡았다. 그다음 내가 메모장에 적은 "예산 : 50만원"이라는 글귀를 뚫어지게 보며 고민에 빠졌다.
우선, 생각보다 비싸게 느껴졌다. 두 군데 학교에 원서를 넣는 비용이 50만 원 상당이니 그조차도 부담이거늘, 첨삭을 받으면 원서 접수비가 두 배가 된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리고 여론을 보면 자기소개서 유료 첨삭을 받은 뒤 돈 아깝다는 평가가 꽤 많이 있었다 (만족하는 사람도 물론 있었다). 게다가 크몽이나 숨고 같은 플랫폼에서 막상 자기소개서 첨삭 광고를 찾아보면 '로스쿨 입시 프리미엄' 같은 게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문과의 상위 테크라는 인식이 있다 보니 그런 듯했다. 그리고 나는 두 군데에 원서를 넣을 것이지만 첨삭 가격은 한 학교당으로 책정되어 있으니 학교당 25만 원꼴이고, 그럼 당초 의도했던 5인 내외 인원의 피드백을 받기에는 예산이 빠듯했다.
다음으로, 돈을 지불함으로써 첨삭의 의미가 변질되는 것이 걱정되었다. 나는 뭐 현직 변호사나 전현직 법대 교수로부터의 프리미엄 피드백을 받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돈을 받는 사람은 그 비용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멀쩡한 글에도 무리하게 개선점을 지적할 것 같았고, 돈을 주는 입장인 나 또한 그 비용에 대한 보상심리로써 글에 대한 주관을 버리고 피드백을 무분별하게 수용할 것 같았다. 이미 변호사스러운 자기소개서를 평가자가 원치도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의도적으로 '부담 없는' 피드백을 받고 싶었다. 글이라는 게 그냥 대충 쭉 읽는 것과 정독해서 읽는 방식은 다른 결과를 불러옴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학담당자는 내 생각에는 전자처럼 읽을 것 같았다. 만약 논문처럼 출판되어 영원히 박제되는 성격의 글이라면 문장에 허점이 없는 게 더 중요할 수 있지만, 표본이 너무 많아 관심을 끄는 게 어려운 성격의 글인 경우에는 유레카 포인트를 만드는 것과 엥? 포인트를 없애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허나, 부담 없는 피드백을 받고 싶은 거지 생각 없는 피드백을 받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냥 내 자소서를 인터넷에 올려놓고 지인들한테 링크를 돌려가며 "피드백 주세요~" 홍보하는 게 어쩌면 가장 저비용으로 많은 피드백을 받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시간어치(읽는 시간 포함)의 피드백을 듣고 싶었다. 이쯤 되었을 때 무슨 사회 실험을 하는 마냥 피드백에 대한 요구사항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한 친구는 "무슨 자기소개서 피드백에 Contribution Guide가 있냐며"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주었다.. ㅎㅎ;
의도 명시하기. 나는 글쓰기에 에고가 강한 사람이므로 주신 피드백을 리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담 갖지 말고 세게 말해도 괜찮다.... 라는 내용을 명시하였다. 또 주로 받고 싶은 피드백의 방식(예: '이부분 너무 급전개임')을 명시하여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였다.
제3자에게 피드백이 공개되지 않게 하기. 예를 들어, 포스트를 올려놓고 "댓글로 피드백을 달아주세요"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면, 피드백을 다는 사람들이 앞에 올라온 댓글을 참고하여 피드백을 달게 된다. 그러면 평가의 독립성을 잃게 된다. 그렇다면 첫 댓글을 다는 사람에게 부담이 가중될 것 또한 자명하다.
피드백 과정에는 관여하지 않기. 부담을 줄이고자 제한 시간을 1시간으로 설정한 건데, 만약 피드백을 하고 있는 상황을 내가 모니터링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공유 문서, 카카오톡 등) 오히려 제한 시간이 타임 어택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즉, 피드백을 언제 시작하고 언제 종료하는지는 내가 확인할 수 없어야 하며 본인이 생각했을 때 충분히 했다 싶은 시점에 일괄적으로 받는 방식을 채택했다.
피드백 방식에 자유를 부여하기. 부탁을 하는 입장인데, 요건에 맞춰 피드백을 달라고 하는 경우 반발심이 들 것을 고려했다. 아예 감이 없는 사람을 위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피드백 방향을 제안하되, 따로 개인 연락처를 남겨 원하는 경우 다른 방식으로 피드백을 남겨도 좋음을 명시했다.
이쯤에서 나는 기술적 구현(?) 방식을 결정하였다. Google Docs에 자기소개서 최신 버전(master)을 올려놓되, 편집 권한은 막아둔다. 피드백은 이 자기소개서 문서의 사본을 직접 만들어서, 혼자서 코멘트를 자유롭게 단 뒤, 그 코멘트가 달린 문서를 나에게 공유하는 방식으로 부탁했다.
나는 내가 다수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뚝심 있게 몰아갈 수 있는 피드백의 한계가 5명이라고 생각했다. 5명이라는 한정된 인원의 범위 내에서 가장 다양성 있게 구성하고 싶었다. 최소 요건은 "과거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적이 있을 정도의 친밀도", "글쓰기에 감각이 있을 것"이었다. 후자 요건은 거창한 게 아니라 본인이 글쓰기를 막연히 두려워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을 뜻한다.
그다음에 고려할 차원은 크게 세 가지였다. "로스쿨 입시에 얼마나 익숙한가?", "IT에 얼마나 친숙한가?", "나를 얼마나 잘 아는가?". 모든 차원은 우열이 있지 않고 양측이 모두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로스쿨 입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콘텐츠적 요소보다는 글 자체의 짜임새에 집중한 피드백을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럼 이 6가지 유형이 고루 배분된 5인을 구성하면 될 것 같았다. 다만 문제는 이 중에서 'IT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과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의외로 후자의 문제는 쉽게 해결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고등학생 나 - 대학생 나 - 직장인 나의 결이 다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분리된 조합을 만들면 되었다. 문제는 전자 '비 IT인'이었다. 내 주변인은 대부분이 컴공 테크를 탄 사람들이고, 문과 출신 직장인이 없지는 않으나 그마저도 IT 스타트업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 내가 말하는 IT 용어들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야심 찬 피드백 세션 준비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나의 가격 허들도 상당히 낮아져서 "한 명한테 10만 원 내외를 주고 유료 첨삭을 받자" 수준에서 마무리를 짓고, 초안을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중간에 에피소드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공식적인 유료 첨삭을 받지는 않기로 했다. 최종적으로 8명으로부터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분명히 1시간 이내를 권장한다고 했지만 절대 그 시간 내에 나올 수 없는 정성들인 피드백 또한 의외로 많이 받을 수 있었다. 퇴사할 때 개발자끼리 십시일반 하여 나에게 퇴사 선물을 사준 이후로 또 오랜만에 내가 쌓아온 과거의 인복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8명 중 3명은 사실상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한 분은 로스쿨 공동입학설명회에서 한국법조인협회 부스에 계셨던 현직 변호사분이셨고, 출신학부와 지원학교가 일치하는 부분에서 반가움을 느끼신 덕분에 굉장히 자세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초안 수정한 이후 이메일을 통해 간단한 A/S까지 해 주셨다. 나머지 두 분은 피드백을 해준 지인분이 소개한 지인의 지인으로, 경영대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과의 특성인지는 모르겠으나 훨씬 날 것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 도움이 많이 되었다.
내가 브런치에 이런 로스쿨 도전기를 쓰고 있다고 명시적으로 알려준 사람이 몇 안되기 때문에, 아마 못 볼 것이라 믿지만 혹시나 우연히라도 이 글을 스치게 되었다면 이 자리를 빌려 다시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정식 감사는 원서 접수가 끝나고 어느 정도 진정된 후에 드리는 부분도 양해를 부탁드린다. 마음 같아선 "글쓴이 1시간 무료 이용권"같은 쿠폰이라도 발급해 노동력(?)을 바칠 의향이 있었지만 오히려 기괴함에 부담을 느낄까 봐 스벅 깊티로 퉁친 부분 너른 이해 바라고 제가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똑같이 괴롭혀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