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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ks Dec 05. 2024

말 잘하기 (X) 말 편하게 하기 (O)

컴공생, 로스쿨에 도전하다 (11)

과학고등학교를 다닐 때 국어 시간에 '토론 수업'이란 것을 해본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주제를 아직도 기억하는데, 토론 때 미리 달달 외워 입론 한 이후에 입 한번 벙긋 못 해 봤기 때문이다. 그 주제란 바로 노동시장의 유연화였다. 아르바이트도 해 보지 않은 학생한테 "노동시장"?? 이제는 직장인도 되어보고 부모님의 자영업도 지켜본 입장에서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각들도 생겼지만, 당시에는 너무 가혹한 주제였다. 그때의 기억이 나름 트라우마라서, 토론에 지레 겁먹게 되었던 것 같다.


말 자체를 잘 못하는 사람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논쟁은 싫어했어도, 설명은 잘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는 같은 말을 여러 번 패러프레이징해 가면서 상대방의 이해를 도울 자신이 있었다. 다만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에 있어서는 거부감이 꽤 컸다. 나는 '맞는' 말을 하고 싶은데, 나와 대척하는 상대는 내가 생각할 틈도 안 주고 계속 말발로 밀어붙이면 일방적으로 쳐맞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 또한 그렇게 무논리로 들이박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MBTI 검사를 해도 다른 건 T 성향으로 나오더라도 "논쟁을 즐기는지"에 있어서 만큼은 완전 F로 평가된다.



"이런 사람이 변호사가 되면, 반대 측 주장 오냐오냐 들어주지 않을까?"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분께, 선호하는 것과 별개로 연습을 통해 겉모습은 얼마든 바꿀 수 있다고 먼저 안심시키고 싶다. 난 MBTI I면서도 일을 할 때 있어서는 텐션을 엄청 높이는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다.


다행히 스타트업에 다니는 3년 동안 이러한 논쟁 문화에는 꽤 익숙해졌다. 다른 사람에게 툭툭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을 곤란하게 하려는 악의가 아닐까 생각했던 나는, 그런 부류가 수상하게 많은 스타트업에서 생활하다 보니 '보통은 그냥 진짜 궁금해서 질문한 거구나' 깨닫게 됐다. 반대로 내가 상대에게 날 것의 질문을 했을 때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물론 사람 가려가며 해야 한다. 스타트업에 들어간 모두가 멘탈갑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집단 평균에 비해서는 신중론자 성격이 있긴 해서, 항상 말 좀 빡세게 하셔도 된다는 식의 요청을 자주 듣긴 했다만, 어쨌든 이제는 "필요할 땐 물러서지 않을 줄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이라... 왠지 이것은 스타트업을 다니면서 생긴 부작용인 것 같다. 면접 스터디를 참여할 때 한 번은 스터디원이 내 말버릇 중 '어쨌든'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차라리 '쪼끔', '이제' 뭐 이런 거는 별 의미 없는 말이니 그러려니 할 텐데, '어쨌든', 풀어쓰면 '어찌 되었든지'라는 것은 꽤 비논리적으로 들리기 마련이니까. 사실 스타트업 입사 이전부터 생긴 말버릇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동네에서는 논거를 차근차근 빌드업해서 최종 결론을 빡 이끌어내는 학계와는 다르게 보다 결과중심적이고, 뭐라도 빠르게 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게 취급받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어쨌든 해야 되는 일이다"와 같이 부연 설명을 시간 관계상 쳐내야 했던 게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본다. 참고로 결국 말버릇은 고치지 못했다. 오히려 '어쨌든'이라고 말한 것을 한 3초 뒤에 의식해 버려서 잠깐 뇌정지가 오는 식으로 악화되는 경향이 있어서, 의식해서 없애려고 하는 대신 말 자체를 천천히 하는 방식으로 '어쨌든' 같은 잉여 어구가 나올 확률을 줄였다.


'말 자체를 천천히 하는...' (ㅋㅋ) 면접 피드백 때 말을 빠르게 한다는 지적도 꽤 자주 받았다. 이것도 어찌 보면 습관의 결과물일 것이라 생각하는데, 대학 들어서 내가 말을 많이 할 때가 시간이 한정된 발표를 하거나, 마찬가지로 시간이 한정된 과외를 하거나 할 때 정도였다 보니, 진도를 빼는 데 열중하게 되어 안 그래도 느린 편은 아니었던 말의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지 않았나 싶다. 물론 이것은 로스쿨 교수님조차도 빠지는 함정이니까 뭐 나라고 벗어날 별 방법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을 잘 맞추는 것 또한 로스쿨 지원자에게는 중요한 역량이라 들었다.


나는 달변가가 아니다. 스타트업에서, 면접 스터디에서 아무리 개조해보려고 해도 여전히 나는 '이기는 말'보단 '맞는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로스쿨에 있어서도 딱히 결점은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나 같은 회의주의자는,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내어 사람의 혼을 뽑아내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가급적 형식보다는 내용에 근거한 판단을 하기 위해 일부러 좀 더 '저 사람의 말은 의심해봐야 한다'는 편향을 주고 듣는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묵직하게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잉여 어구 안 넣는 게 좋고, 아이컨택 잘하는 게 좋고, 말은 또박또박하는 게 좋지만, 어지간히 말발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왠종일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유튜브 같은 편집본에서는 사람들이 정말 말을 잘 쏟아내지만, 무편집 라이브를 보면 저 사람도 편집본 보고 생각한 만큼의 달변가는 아니구나 싶을 때도 많이 느꼈다. 면접 스터디를 할 때도, 물론 그런 경향은 있었지만, 문과나 경영 전공은 말을 정말 잘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심지어 로스쿨 준비생이니까!) 막 미친 수준까지는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경험은 말을 잘하기보다는 말을 편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뭐 실제로 면접 보고 왔을 때도, 무사히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으니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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