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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다정이 Apr 26. 2020

3. 끈질기게 보통일 삶

2018. 1. 13





살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과제들이 있다. 진학과 졸업, 취업과 연애, 그리고 결혼 같은 것. 꼭 이런 결이 아니더라도 매 순간 과제가 온다. 해야 하거나 한 번쯤 진득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일들이. 마땅한 삶의 순서라는 게 있다고 여겨지는 사회이니까.


나는 닥쳐오는 과제에 취약하다. 해야 할 일들 앞에서 정작 무엇도 하지 않은 채 생각만 한다. 웬만큼은 회피하기 일쑤고, 그러다 더 이상 회피할 수가 없을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무마하며 조금 발을 내딛는 정도이다. 그게 앞으로 디딘 발인지 뒤로 헛디딘 발인지도 몰라하며, 내가 있는 곳을 간신히 가늠해 보는 정도가 나의 삶이다. 어영부영 살아지는 대로 살다가 언젠가는 아차, 하며 제 앞에 닥친 과제를 확인하고 머뭇거리다 폭삭 망하는 삶―아직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지만 망해버릴 미래를 어렴풋이 예감하며 우두커니 버티는 삶에 가깝겠다. 그러니까 여태 스물아홉 먹기까지 대학 졸업도 못하고 변변찮게 살고 있는 걸 테다.


마땅한 삶의 순서는 진즉에 놓친 지 오래인 내게, 지금 분명하게 닥친 과제는 취업이다. 먹고사는 문제. 새로 맞이한 올 한 해는 그것에 힘을 들일 예정이지만, 언제나 막연하게 예상만 할 뿐, 정작 무얼 해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 채로 앞으로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갈 것임을 안다. 무엇도 모르겠는 상황에서 분명한 건 ‘무엇도 모르겠다’는 것 단 하나뿐이다.




도무지 모르겠는 2018년을 맞이하기 직전, 우연찮게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 <초행>을 감상할 수 있었다. 페이스북으로 접한 예고편 덕분에 알게 된 영화였다. 내가 10년을 거주한 적 있는 ‘삼척’이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먼저 눈길을 끌었고, 김새벽 배우가 분한 지영이 차창을 퍽하고 내려치며 ‘나 너무 무서워!’라고 말하는 그 순간이 실로 인상적이었다. 2018년, 그러니까 20대로서의 마지막 해를 목전에 둔 내 마음과 온도랄까, 리듬 같은 것과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나 너무 무서워!'였다. 그렇게 영화 <초행>은 새해가 닥치기 전에 꼭 보고 싶은 영화가 되었다. 그런 마음으로 응모한 이벤트에 당첨이 되었고, 그건 막바지에 다다른 2017년의 즐거운 소식 중 하나였다.





<초행>은 마구 흔들리는 순간들로 무장해 있었다. 7년을 연애하고 있고, 지금은 동거 중인 젊은 남녀가 결혼이라는 큰 과제를 목전에 두고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확신할 수 없지만, 걸음을 내딛으려는 지금은 분명히 있다’는 얼굴을 하고서는. 불투명한 내 미래의 어느 저편 같은 모습을 한 채로.


스크린 너머의 두 남녀가 어떤 기로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하다가, 여전히 방황하는 채로 미래를 도모하는 마지막까지. 영화 <초행>은 그 무엇에도 결론을 내리지 않으려는 듯했지만, 내 안에서는 어떤 결론이 생겨나고 있었다. 하루가 가고 또 다른 하루가 오는 우리네 삶에 대한 확신 비슷한 무엇이.




두 인물은 동거 중이다. 그리고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집안에는 박스가 한가득이다. 분명한 거주지 없이 2년마다 거처를 옮겨 다니는 게 보통의 삶인 지금 우리네 모습과 같다. 수현은 곧 있을 아버지 환갑잔치 소식을 전해 듣는다. 형은 지영 씨도 데리고 오라고 한다. 수현은 지영이에게 넌지시 '너도 오라는데….’를 말한다. 지영은 연애하는 내내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현의 가족을 곧 만날 예정이다. 자연스레 결혼이 화두로 떠오른다. 하필이라고 해야 할까, 지영은 생리를 않는다. 생리를 않는다는 지영의 말에 수현은 몇 번이고 '진짜?'를 되묻다 잠깐 방을 나선다. 지영은 새로 이사한 부모의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임신테스트기를 산다.




지영의 엄마는 자식과 자식의 연인이 앞으로 도모할 삶의 모습이 어떠할지, 당최 있기는 한 건지 궁금하다. 결혼은 언제, 라는 질문은 하지 않으려 절로 입 밖으로 나온다. 이런 얘기는 나중에 해,라고 지영이 답할수록 엄마의 말은 날이 선다.


지영은 2 계약이 끝나가는 상황이고, 수현은 대학원을 준비 중이다.  사람에게 아직 무엇도 확실한  없는데 주변 사람들과 마음 한구석은 어디로든 박차를 가하라고 성화다. 임신이라든지 결혼이라든지 직업이라든지 미래라든지,  말이  많지만서도 일단 않고서  사람은 수현의 고향인 삼척으로 향한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 광화문은 한창 촛불시위로 반짝인다. 막막한 현실과 조그만 희망이 병치되어 존재하는 2016 겨울이 그들의 배경이자, 이야기다.


 


영화 <초행>에서 내내 준비 이던 이사는 끝끝내 준비 중이었다. 지영은 다시 재계약을 했는지, 수현은 무사히 대학원을 갔는지. 지영은 그래서 임신을 했나, 임신테스트기는 무엇을 말했나.  사람은 결혼을 하는가.


 무엇에도 불충분하고 불명확해서, 영화를  때면 으레 겪곤 하는 ‘클라이맥스  해소랄게 없다. 갈등의 행방은 오리무중이  채로,  사람은 내내 운전을 하며 인천과 삼척을 선회하다 말미에 광화문을 걷는다.  손엔 촛불을  채로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물으며. 영화가 그럴싸하게 직조된 서사를 내려놓는 순간, 영화의 삶은 진짜 여기에 있는  언저리의 무엇이 된다. 불충분하고 불명확한 삶과 아주 닮아있는 시간이.





결혼, 임신, 앞으로의 진로. 커다란 질문들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수현과 지영은 심각하게 골몰하지만은 않는다. 골몰하더라도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대체로 일상이라는 범주 안에 있다. 화두는 좀처럼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대화는 진지하다가도 농담이 끼어들어 말랑해진다. 잠시 차갑더라도 이내 장난처럼 서로에게 끼어들고, 그러다가도  너무 무섭다고 하소연도 하고, 하소연하는 이의 어깨를 토닥여 주다가도, 떠오르는 해와 바다가  너무 예쁘니까, 방금 울었던 얼굴을 맞대고 함께 사진도 찍는다. 정말 보통의 삶이다.


당장 헤어질 인연도 아니니 닥쳐올 문제도 당장 끝을 봐야 하는  아니다. 문제를 파고들어 끝을 보지 않는, 수현과 지영의 태도는 그들이 어떤 시간을 관통해 왔고 앞으로 어떤 시간을 관통할는지 예감케 한다. 유연해서 단단한 관계라는  있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유연해서 단단한 것은 영화 <초행> 카메라도 마찬가지였다. 카메라는 어떤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단지 인물들을 지켜보기만 한다. 내내 음악도 없었다. 간섭하기를 극구 꺼려하는 어떤 태도가 다급하지 않고 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간섭도 포기한 카메라의 시선은 무섭다. 그런 시선이 실로 관객을 간섭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다수의 영화들이 컷을 잘게 나누어  순간을 다양하게 담기 바쁜 반면, 영화 <초행> 우두커니  시선만을 고수한다. 동시에 카메라는 인물의 어떤 움직임도 허용한  함께 움직인다.  순간 흔들리는 화면이다. 멀미가   같은 초행길처럼. 그런 시선은 예상치 못한 어떤 순간이든 기어코 담아내겠다는 태도 같다. 불확실해 보이는 시간들과 순간들로 프레임을 쌓아 올려 보이겠노라는. 그건 불분명하게 흩어지기만 하는 순간들의 연속이 기어코 맞이할 어떤 미래를 예감하게 한다.




나는 <초행>을 보며 내 미래를 예감하게 된 것이다. 도무지 보이지 않는 미래가 실은 별 볼일 없는 모습일 거라는 걸. 도저히 없을 것 같은 미래가, 별 거 없는 얼굴을 하고서 기어코 올 거라는 걸. 커다란 갈등도 없이. 설령 있더라도 극적인 갈무리 같은 건 없을 거야. 당신과 나는 대치하다가도 마주 앉아 밥을 먹을 것이며, 무거워진 분위기도 작은 농담에 쉬이 가벼워지겠지. 그러니까 여태껏 그래 왔듯 앞으로도 나는 잠자코 일상을 살아낼 것이며, 종종 울고 실없는 소리도 하다가 또 웃을 것이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불행이라든가 갈등이라든가 하는 것들도 있겠지만 동시에 끈질기게 보통의 삶일 것이다.




순간 막연했던 미래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친숙해진 미래는 구원이 되나. 절망은 아닐까. 영화 말미, 끝끝내 맞닿은 수현과 지영의 어깻죽지는 구원에 가깝다고 말하는 듯했다. 내 곁에는 누가 있더라. 잠깐 생각하다 말았다.


갈등이 치닫지 않고 도사리고만 있는 때, 사람들은 이따금 버티다 단지 동행한다. 그럼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온다. 그게 조용히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데가 있다. 비단 스크린 너머의 삶만 그런 것은 아니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배우들의 즉흥적인 연기는 스크린 바깥에 있는 시간을 불러낸다.  도무지 정제되지 않을 시간들을 영화 속 삶에 접붙인다. 당신의 시간도 분명, 조용히 유쾌하고 사랑스러울 거라고 다독이는 것처럼.

 

2017년의 마지막 영화가 <초행>이었다. 도무지 모르겠어서 막막하기만 한 미래를 조금은 기다릴 수 있겠다는 마음이 되었다.








2018.1.13

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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