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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아씨 Sep 23. 2018

맛있으면 됐지, 무슨 맛인지 아는게 뭐가 중요해요

얼마 전 세미나에서 와인을 이제 막 좋아하기 시작한 분들에게 와인 시음법을 알려드렸다. 와인의 세계에서는 아주 예전부터 쓰인 미각, 후각, 시각에 따른 평가 방법이었는데, 수강생 분들은 이런 방식의 시음을 처음 접해서 후각 표현하는 일을 유독 어려워 했다.

와인은 쉬운 것이랍니다~라며 어려운 길로 안내한 것이 아닌가 반성한다.


구리 올챙이적 시절 모른다고, 나는 속으로 '피노 누아와 카베르네 소비뇽에서 이렇게 다른 향이 나는데 향을 표현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까?'라며 의아했다.  


그러다 문득, 오늘 커피를 마시면서 깨달았다. 그렇게 와인 한 병에서 이런 저런 향이 난다고 강의하던 나는 과연 커피에서 다양한 향을 느끼며 마셔왔던가?


이미 한 잔을 거의 들이켰지만 어떤 향이 났는지 기억조차 안난다. 와인을 마실 때처럼 모든 감각을 열어 애쓰며 마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금 마신 커피는 그저 나른한 오후를 깨워주는 '그럭저럭 마실만한 맛'의 커피였다. 와인 이외의 음료에 이토록 무관심한 내모습에 새삼 놀라, 애써 커피에서 어떤 향이 나는지 표현해보려 했으나 '고소한 커피 콩' 이상의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순수히 음료를 소비하는 입장이라면, 처음부터 내가 마시는 음료의 향과 맛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내 입맛에 맛있고, 향긋하면 그만이다. 음료의 맛을 철저히 분석하려고 마시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 맛이 어떤 맛인지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시음 노트를 찾아보면 될 일이다.


와인, 꼭 무슨 맛인지 정확히 파악하며 마셔야 할까?


더 나아가면, 커피나 와인같은 음료는 맛이 아닌 다른 기능을 할 때가 많다. 나의 경우 커피는 '각성' 또는 '대화'의 순간에 찾는 음료다. 그래서 이런 순간마다 내 손에 가장 빠르게 닿는 커피를 선택한다. 지금 당장 잠을 깨서 일에 속도를 내야 하는데 사무실에서 20분 떨어진 카페의 맛있는 커피를 사러 가지 않는 것이다. 맛은 그 다음이다. 너무 쓰거나 셔서 다음에 다시는 먹고 싶지 않은 커피가 아닌 이상, '그래, 커피맛이네!'하고 넘어간다. 다른 누군가에게 커피는 공부할 장소가 필요하여 구매하는 자릿세의 기능도 할 수 있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와인 탐구자인 내게 많은 경우(역시 항상은 아니다) 맛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다보니 와인을 마실 때마다 향의 종류와 산미, 당도 등을 자연스레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와인의 첫 번째 역할이 '분위기를 돋우는 일'일 수 있다.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 데이, 아니면 중요한 사업 파트너와의 식사에서 와인이 분위기를 살리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그는 제 역할을 한 것이다. 와인의 맛에 몰입하지 않더라도 그 존재만으로 만족감을 느꼈으니 말이다.  


따라서 스트레스 받아가며 마시는 모든 와인을 이렇다, 저렇다 표현할 필요는 없다. 마시는 순간의 분위기가 좋았고 내 입맛에 괜찮았다면 '맛있다'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하다. 나 역시 커피에 이런 저런 평가를 하기보다 '맛있네' 혹은 '맛없네'라는 한 마디로 편하게 즐기고 싶다. 아직 내게는 커피가 맛보다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음료이기 때문이다.


와인에 입문하는 분들께 맛에 초점을 맞춘 시음법을 열심히 전해왔지만, 요즘따라 그 '시음 방법'이라는 것에 의문을 품게 된다.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걸 알려준 게 누군가에게는 일종의 강요가 아니었을런지. 앞으로는 맛있나요, 맛없나요로 강의를 이어가는게 좋겠다. 즐거운 술문화를 이룩하는 데는 생각보다 다양한 길이 있다는 걸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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