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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izelnut Jul 31. 2020

   “그러실 분이 아닌데…”


정희 언니가 이상한 구설수에 휘말렸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언니는 내게 누구보다도 각별한 존재였다. 매일 아침 집에서 손수 타 온 따뜻한 유자차를 건네주던 손길이 눈에 선하던 때였으니까. 내가 선배들에게 조금이라도 싫은 소리를 듣고 오면 꼭 집으로 초대해서 밥 한끼 해 주던 사람이었다. 아무리 외롭고 힘들어도 집에서 먹는 따뜻한 밥 한끼에 다시 정신 차리고 일어설 수 있는 거라고 눈을 마주치며 말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 언니가 횡령이라니. 비현실적인 소문이었다.


   퇴근 길에 언니는 꼭 3번 출구로 나갔다. 언니네 집에 종종 따라가던 나는 귀찮을 때가 많았다. 그냥 2번 출구로 나와서 골목길로 조금만 들어가면 집이 코앞인데, 굳이 길 건너 3번 출구로 나오는 언니가 미련스럽게 느껴졌다. 3번 출구 앞에는 항상 나물을 파는 할머니가 계셨다. 언니는 양이 얼마나 남았던 상관하지 않고 모조리 달라고 떼를 썼다. 저녁 6시 20분, 언니가 퇴근하는 시간이 할머니의 퇴근시간이 되었다. 언니는 그날 그날 할머니가 파시는 나물로 나에게 저녁을 해 주었다. 달래가 나온 날이면 달래 된장국을, 봄동이 나온 날이면 봄동 무침을 해주었다. 내가 저녁을 먹으러 가지 않는 날이면 많은 나물을 어쩌지 못하고 다음날 도시락까지 싸오곤 했다.


   “횡령이라니, 간도 크지, 어쩌려고 그런 거래 정말.” 휴게실이고 화장실이고 언니의 얘기가 들려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하릴없이 회사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좋은 얘깃거리였다. 시골에서 올라와 악착같이 살던 언니를 칭찬하고 예뻐하던 선배들까지 언니의 파렴치한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모든 사람들이 악마처럼 보였다. 다들 언니가 그렇게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누구 하나 언니를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냉정하고 야박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분명 정희언니가 그랬을 리가 없는데, 다들 사실이 밝혀지면 미안해서 어쩌려고 그러나.


   징계위원회 발표가 나고 나는 믿을 수가 없어 언니를 불러냈다. 자기 만나는 거 회사에 소문 돌면 너도 이상한 사람으로 눈 밖에 난다고 거절하던 언니를 끈질기게 불러냈다. 나는 언니를 보자마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지? 아니잖아.” 언니는 예상 밖의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끝까지 믿었던 내게 미안해하지도 않고,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정말 별일 아니었어, 남들 다 하는 일이었다고, 재수없게 내가 걸린 거야. 알잖아 부장이 예전부터 나 싫어했던 거.” 언니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언니가 팀장 자리를 꿰차고 난 후에는 많이 못 만나기는 했다. 워낙 일이 많아서 바빴으니까. 그래도 주말에는 가끔 좋은 데 가서 밥도 먹고, 카페에서 예전처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주 가끔 언니에게 전에 없던 욕망이 보일 때 놀라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냥 책임감이 많아졌구나 생각했다. 그치만 오늘의 언니는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언니에게 이번 징계는 그저 운 나쁜 일에 불과했다. 오히려 누가 고발했는지 알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 같았다. 나는 순간 테이블에서 몸을 뗐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 앉아있는 느낌처럼 어색하고 당황스러웠다. “자리가 사람을 바꾼다니까…” 오늘 점심 때 선배가 했던 이야기가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간다. 


   언니는 시골로 발령받고 곧장 내려갔다. 내가 서울에서 가장 의지했던 사람이 사라지니까 시간이 많아졌다. 주말에 할 일도, 퇴근하고 나면 갈 곳도 없어졌다. 무엇보다 사람을 피하게 됐다. 팀에 새로운 사람이 와도 그 뿐이었다. 모든 말들이 인사치레처럼 느껴졌다. 모든 선의의 행동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병이 생겼다. 병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되도록 가지 않았다. 누군가를 보면 계속해서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언제 또 어떻게 변할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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