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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감각만을 사용한다는 것

영어 오디오북에 번쩍 눈을 뜨게 된 건, 몇 달 전 미국행 비행기 안이었어요.


워낙 비행기 안에서는 할 일이 없기도 하고, 또 기내에서는 기내 엔터테인먼트를 뒤적거리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기에 기내식을 끝내고 부리나케 앞에 있는 화면을 톡톡 쳐서 열었죠.

그런데 의외로 그다지 흥미로운 영화도 없고, 음악도 몇 개 없어서 시무룩해지려는 찰나, 화면 한구석에 오디오북 이 있는 걸 봤어요. 궁금한 마음에 눌러보니 이런저런 책표지가 나오더라고요. 그중에서 익숙한 '줄리안 무어'의 이름이 있는 책 표지를 클릭하고 헤드폰을 썼습니다.


단순히 오디오북이 궁금해서 + 영어니까 무조건 도움이 되겠지. 라며.



'.. 어? 뭐지?'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첫 문장부터 몰입도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상상한 오디오북은 시리와 같은 딱딱한 AI가 띄어쓰기와 발음을 어색하게 하며 읽는 것이었는데, 그게 아니라 완전 한 편의 영화더라고요. 어쩌면 연극에 가까운 듯도 했고요. 시각적 요소가 하나도 없고 청각적 요소로만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니 연기력에 더 신경을 쓴 것 같았어요. 들리는 효과음들도 (또각또각 구두 소리, 바쁘게 종이 넘기는 소리 등) 적재적소에 딱 필요한 만큼만 넣어서 집중도를 더 높여주고 있었고요.


마치 영화관에 가서 화면과 조명은 깜깜한 가운데에 이어폰으로 영화 대사만 듣는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오디오북을 듣다가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오디오북의 맛만 보고 비행기에서 내렸어요.


그렇게 오디오북은 잊고 있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제가 좋아하는 영어 원서 오디오북을 찾아봤어요. 그 책을 상시 읽고 싶은데 늘 책을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 운전할 때나 걸어서 이동할 때 들으면 어떨까 싶기도 해서 개별로 그 책의 오디오북만 구매해서 듣기 시작했죠. 그런데 그 오디오북을 읽어주는 사람이 무려 그 책의 저자더라고요.


그때 두 번째로 띵-했습니다. '아  오디오북이 내가 상상한 것만큼 시시하고 기계적인 분야가 절대 아니구나...'라는 것이 확 와닿았기 때문이죠.


여하튼, 이게 웬 횡재야! 라며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제 메일함에 주기적으로 오더블에서 광고메일을 보내왔어요. 그래서 슬그머니 한 번 들어가 보았고, 미리 듣기도 가능하다며 유혹하기에 무언가 미스터리해 보이는 표지를 클릭해서 들었어요.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은 여자가 이웃집에서 살인사건이 났으니 얼른 가봐야겠다며 급하게 나갈 채비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했는데요.


'엇.... 뭐지 이 생생함은.......'


다시금 어마어마한 몰입감을 경험했어요. 그렇게 스토리에 스며드는 순간, 미리 듣기가 끝나더라고요.



계속 듣고 싶었지만, 에이 구독한다고 내가 오디오북을 얼마나 듣겠어.라는 마음으로 그 후로 또 몇 달간 신경 쓰지 않았죠.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어제는 오디오북이 너무나 듣고 싶더라고요. 그때 듣다만 그 오디오북이요.


그래서 다시 오더블에 들어가서 한 달에 7.95불이라는 플랜을 결제하고 그때 듣다만 오디오북을 찾아 삼만 리를 했습니다. 그 책을 듣기 위해 결제했는데 제목을 기억하지 못했기에 온갖 미스터리 카테고리를 뒤지다가 겨우 찾아서 바로 재생하기를 눌렀어요.  


그렇게 찾고 찾던 오디오북을 듣기 시작했는데.... 이 오디오북이 얼마나 재밌었냐면요, 정신 차려보니 거의 두 시간이 지나있었어요.


오감 중에 한 감각만을 사용하는 것이 집중도를 어마무시하게 끌어 올 수 있다는걸 알게되었어요.


아마 눈으로 원서를 읽었다면 중간에 지루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고 절대 두 시간을 내리읽을 순 없었을 것 같은데, 오디오북을 듣다 보니 방해요소 없이 두 시간을 이끌려가게 됐어요.


중간에 놓치는 부분도 있었고 특유의 억양이 나오면 못 알아듣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뿌듯한 부분은 영어로 된 이야기를 내가 두 시간 동안 쫓아오며 들었다는 것이에요.


영어 오디오북의 장점 중 하나가, 영어 듣기 평가 같은 느낌이 전혀 없고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는 점이요. 이야기에 빠져들어 있다 보니, 이 영어가 들리냐 마냐 테스트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영어로 된 스토리에 집중하기 바쁘더라고요. 그야말로 내가 영어로 '유희'를 즐기고 있는 셈이 되었죠.


저 같은 경우에는 원서를 읽으면 자꾸만 직독직해 욕구가 올라오고, 좋은 표현이 나오면 자꾸만 줄 치고 싶고.. 지금까지 영어를 공부해  습관들이 나오려고 해서 방해가 될 때가 있거든요. 그리고 영어로 된 영화나 미드는 시작하는 순간 자동으로 '너 저 말 들려?'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소리가 들리고 '한국어 자막을 켜고 보는 거야?' 등의 목소리가 들려서 가뭄에 콩 나듯 보고요. (저는 주로 일드만 본답니다..)



그런데 영어 오디오북은 신세계였어요.


제가 들은 오디오북은 자기 계발서나 자서전 등의 형태가 아니라 대사가 끝없이 나오는 미스터리물이어서 그런지 더 생생하기도 했어요. 듣다가 중간중간 아 이렇게 생생하게 미국인들의 대화를 엿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영어에 깊이 있게 흡수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미드나 영어원서로는 왠지 영어 공부를 할 엄두가 나지 않는 분들이 계시다면, 영어 오디오북에 한 번 도전해 보세요. 4-5분 정도는 미리 듣기가 가능하니 이런저런 오디오북을 들어보시고, 개별로 한 오디오북만 구매해서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 스스로 나에게 치는 '영어 듣기 평가의 덫'에서 벗어나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이렇게 테스트가 아닌 재미와 유희의 수단으로, 대상으로 영어와 지내는 방법들을 알아가는 것이 영어공부를 재밌게 꾸준히 해 나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우리 모두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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