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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인 Nov 26. 2023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_한기호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고통이 무엇인지와 그 의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당한 사람이 그 고통과 거기서 비롯된 외로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고통에 어떻게 맞서며 넘어가려고 했는지, 그 고군분투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의 겪음에 대한 기록이며 겪고 있는 자기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이것이 통하게 된다.

<고통을 나눌 수 있는가?>, p 126


 우리 사회가 많이 아프다. 한동안 따뜻한 위로를 건네던 책들이 큰 인기를 끌더니, 이제는 정신병동을 다루는 드라마까지 나왔다. 자기 아픔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였던 과거를 생각해 본다면 유의미한 변화다. 아픔을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고 인내를 강요하던 사회적 분위기에 조금씩 균열이 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개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안아주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오늘 리뷰할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라는 책은 고통 자체와 고통의 곁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인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는 우리 사회가 변화를 이루기 위해 당면해야 하는 과제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하고 쉬운 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것이 조금은 답답하다 느낄 수 있지만 나는 오히려 상대에 대한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우리 사회에게 필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은 '우리가 과연 상대의 고통을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상대가 느끼는 고통의 이유와 정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적절한 위로를 건네는 것 또한 쉬워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의 고통에 완전히 공감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는다. 언어에 고통을 온전히 담을 수 없을뿐더러 본인마저도 자신의 고통을 완전하게 알기 어렵다. 그 근원과 이유를 다 이해한다면 그 순간 그것은 고통이 아닐 것이다. 본인도 이런데 타인이 그 고통을 완전히 깨우친다는 게 가능할 리 없다. 이 책은 '나는 상대의 고통을 온전하게 알 수 없다'라는 겸허한 선언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우리 존재는 상대를 위하는 마음을 품고서도 자신의 관점에서 위로를 건넬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같은 아픔을 접하더라도 그 아픔을 바라보는 관점과 위로의 형태가 천차만별이다. 이 책은 아픔에 대한 언어를 개인적 언어, 사회적 언어, 우주적 언어로 분류한다. 개인적 언어는 개인의 내면, 사회적 언어는 사회 구조, 우주적 언어는 종교적 구원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이런 노력들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게 만들지만 고통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개인적 언어는 개인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는 설명력이 떨어지고, 사회적 언어나 우주적 언어는 개인의 개별성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고통을 언어에 담았을 때 남는 찝찝함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고통 앞에 겸손해져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언어는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철저한 자각으로부터 나온다. 말할 수 없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고 분할하게 된다. 언어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표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 앞에서 침묵하게 하고 그가 당한 고통의 절대성에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게 한다. 관종 사회는 고통받는 사람의 존엄이 존중되는 바로 이 길을 봉쇄했다.

<고통을 나눌 수 있는가?>, p 209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좋은 위로를 건네고 있는가? 요즘 보면 '사회적 시선을 무시한 채 너의 삶을 살아라' 류의 책이 많다. 물론 좋은 말이지만, 이는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관계에서의 정체성과 사회에서의 정체성을 배제한 채 살아가라는 말은 너무 힘든 요구다. 우리는 공동체와 사회 구조로부터 완전히 도망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런 책들이 주류가 되는 이유가 있다. 사회적 존재감을 얻기 위해서는 사회의 요구에 순응해야 하고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주목'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고통이라는 측면에서도 동일하다. 피해자는 '피해자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해야 사람들이 주목해야 한다. 자신의 고통을 사회에 전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주목을 끌지 못하면 사회는 그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 고통받는 이들에게 선택지는 두 개가 되는 것이다. '나의 고통을 전시하던가, 고통을 개인의 몫으로 남기던가'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고통의 곁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고통을 타인에게 오롯이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고통을 겪는 이들은 고통의 절대성에 내면이 무너져 이를 진단하고 해석할 여력이 없다. 여기서 저자는 우리가 고통의 곁에는 접근할 수 있다 설명한다. 그 곁이란 고통으로 말미암은 감정들과 변화들 그리고 그에 대응하려는 노력들이다. 우리가 고통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는 없지만 아픈 이들이 그 속에서 싸워온 이야기에는 다가설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힘을 보탬으로써 함께할 수 있다 말한다. 이렇게 고통의 곁에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자신의 고통에 맞설 수 있도록 지지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존재의 한계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낸다.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고통이 무엇인지와 그 의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당한 사람이 그 고통과 거기서 비롯된 외로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고통에 어떻게 맞서며 넘어가려고 했는지, 그 고군분투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의 겪음에 대한 기록이며 겪고 있는 자기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이것이 통하게 된다.


 최은영의 소설을 읽을 때 이런 질문을 하곤 했다. 내 마음을 이렇게 잘 아는 소설이 있는데 아픈 이가 왜 이리 많을까?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서 어렴풋이 알게 됐다. 사람마다 남이 쉽게 말할 수 없는, 자기만의 몫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섣불리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린 모두 홀로 살아가야 할까? 이 책은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을 통해 자신을 알고 힘을 얻는다 말한다. 그러니 상대의 영역에 함부로 침입하지 않되 그의 근처를 지켜줘야 하는 것이다. 우린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어야 한다.




인용구


사랑하는 이는 사랑받는 이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 다른 누구도, 무엇도 아닌 나로서의 나, 우리는 이것을 '인격'이라 부른다. 사람은 누구나 나 자체로 존중받고 싶어하고, 특히 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이가 그렇게 대해주길 바란다. 사랑은 내가 다른 어떤 속성이 이니라 바로 인격으로서 존중받는 것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모욕당하고 손상된 존재감을 고양해준다.
그러나 이 책 전체를 통해 이야기한 것처럼 만일 고통이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고통에 대한 접근에서는 고통의 본질을 보여주는 장면에 대한 예리한 포착보다 그 지층에 대한 신중한 읽기와 쓰기가 더 필요하다. 그러한 접근을 통해 길어온 말과 이야기가 고통을 겪는 이와 그 곁에 선 사람이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에 대한 앎에 이르며 또한 보태고 나누면서 고통에 대한 쓸모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곁을 내어준다는 말이 있다. 곁은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친구로서 상대를 돌보고 환대하는 것이 곁이다. 그렇기에 내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곁이 누구보다 먼저 내 이야기를 듣고 헤아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자신의 고통을 말로 표현하지 못할 때조차 그 고통에 공감하고 같이 아파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곁'이라는 친밀성의 세계가 갖는 특징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도 배운 사람, 즉 언어가 있는 사람에겐 쪼갤 수 있는 미세한 차이가 보인다. 그는 이를 해상도에 비유한다. 즉 교양이 있다는 말은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해상도를 높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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