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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인 Nov 21. 2023

<이방인>_알베르 카뮈

누군가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그려야 한다.

 해야 되니까요. 다들 딸린 식구 주렁주렁 많고 책임져야 할 게 많으니까. 좀 쑤시고 지루하고 하기 싫어도 좋은 척 상냥한 척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하는 거예요. 먹고사는 문제가 장난 같아 보여요?
 그래서 주무관님이 섞이지 못하는 거예요. 다들 치열한 실전인데 주무관님만 널널한 연습인 느낌이라. 내 딸도, 내 딸도 그래. 인생에 연습이 없는데 자꾸만 한 번 더, 한 번 더. 그 한 번 더의 무게는 누가 감당하는 줄 알고. 

- <딱 1인분만 할게요 >, 이서기


 그렇다.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의 삶은 단 한 번뿐이다. 삶의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으며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지도 못한다. 이러한 조건은 우리로 하여금 잘 살아야 한다는 삶의 무게를 느끼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는 반대의 관점에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잘 살고자 발버둥 쳐도 결국 우리 삶은 죽음으로 이른다. 우리가 아무리 높은 곳에 있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갈 때는 모두가 빈 손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삶은 허무하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다시 균형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어느 정도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까?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이라는 책을 읽고, 실존주의 철학에 관심이 생겼다.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끌어오지 않고도 삶의 의미와 윤리를 건져낸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대표적인 실존주의자 중 한 명인 알베르 카뮈가 쓴 소설 <이방인>은 부조리 문학으로 분류된다. 과연 여기서 부조리는 무엇을 뜻할까? 이는 한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와 결부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는 점에서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은 삶에서 의미를 추구한다는 점이 대표적인 부조리다. 실존주의는 이러한 존재 자체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신은 이토록 허무하고 고통스럽고 불안정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으면서 훈계했다. 나는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분연히 앉아버렸다. 그럴 수는 없다며, 누구나, 비록 하느님의 얼굴을 외면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느님을 믿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그의 신념이요, 만약 그것을 의심해야 한다면 그의 생애는 무의미해지고 만다는 것이었다.

- <이방인>, 알베르 카뮈


 소설 <이방인>은 이러한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직면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파트로 나눠볼 수 있다. 소설의 전반부는 뫼르소라는 인물이 아랍인을 살해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후반부는 그의 범죄행위에 대한 재판과정을 다룬다. 이렇게만 말하면 마치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인 듯 하지만, 핵심은 뫼르소라는 사람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과 그것에 대응해 나타나는 그의 사색이다.

 앞서 말했듯 재판의 명목은 그의 살해행위였지만, 심판의 영역은 그의 범죄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범죄행위보다 그가 보이는 불온한 태도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그가 어머니의 죽음에도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는 점, 죄를 저질렀음에도 크게 반성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신에게 복종하지 모습 등이 크게 문제가 된다. 여기서 지적되는 공동체, 윤리 그리고 종교는 인간의 삶에 의미와 안정감을 부여하는 장치들이다. 그러나 뫼르소가 그것들에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자 사람들은 분노를 표하고 급기야 판사는 사형을 선고한다. 물론 그가 아랍인을 죽였다는 사실은 문제가 있지만 당시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였기에 낮은 형량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의 범죄행위 자체보다 보편적 삶의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 더 크게 분노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가 사형을 선고받고 난 이후의 태도다. 그는 불행감을 느끼거나 사람들이 요구하는 방향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사형 집행을 당하는 날 다른 사람들이 증오의 함성을 들려줬으면 한다고까지 말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바는 이렇다. 우리는 본래 부조리하고 불완전한 존재다. 우리 모두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형수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시간과 행위들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외부에서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를 끌어온다. 뫼르소는 이것에 반문한다. 행위의 주체는 나 자신인데 판단의 기준을 외부에서 끌어오는 것이 맞는가? 그는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조리를 직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끝이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내가 지금 보내고 있는 시간들에 집중하고, 다른 것에 의탁하지 않음으로 나의 존재로 온전히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것은 너보다 더 강하다.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내게는 있어. 그렇다. 내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언제나 또 옳으리라.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을 하고 저런 것을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지만 이러저러한 다른 일은 했다.


 돌아보면 내 삶도 부조리를 떨쳐내기 위한 과정이자 싸움이었다. 언젠가는 나를 온전히 알아주는 관계와 안정감을 주는 조직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이룰 수 없는 꿈임을 깨달았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온전히 알고 품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나도 이방인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이 말이 나 혼자 살아가겠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나를 지탱했던 관계들이나 시간들이 더욱 소중한 것임을 의미한다. 타인을 좋아하고 믿는다는 것은 본래 쉬운 것이 아니니 말이다. 이에 더해 관계의 엇나감을 슬퍼하기보다 함께했던 시간들을 기적으로 여겨야 함을 배운다. 

 나는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루하루 내 삶에 충실하되, 세상에 대한 다정함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호의는 놓치지 않고 살아가야겠다 정도 아닐까 싶다. 다시 한번 문장을 인용해 보면, 누군가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그려야 한다.


사실 이건 어머니의 생각이었는데 어머니는 늘 말하기를, 사람은 무엇에나 결국은 익숙해지는 법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것을 비난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가 가질 수 없는 것이 그에게 없다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법정에서는 관용이라는 소극적인 덕목은 그보다 더 어렵기는 하지만, 더 높은 정의라는 덕목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특히 이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심리의 공허가 사회 전체를 삼켜버릴 수도 있는 심연이 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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