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에 맞서지는 못하지만 휩쓸리기는 싫은 이상한 자존심.
'우리의 삶도 밖으로부터의 요청에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측면과 그 요청이 합리적인지를 따지는 측면의 결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칸트가 하급학부의 중요성을 역설했듯이, 언제나 살아남기에 대한 살아가기의 우위를 만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중요하고요. 우리가 존엄한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저 살아남고자 존재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
고준우_<대학생은 처음이라>_p 149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통해 스스로 지식을 생산하는 방법을 배우는 시민으로서, 사회가 요청하는 다양한 전문 지식과 기술을 익히고 생산적인 일에 나서야 하는 국민으로서,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과 내가 세상에 원하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하는 인격으로서 존재하는 것'
고준우_<대학생은 처음이라>_p 153
고등학교 시절엔, 대학만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 우리 사회는 좋은 대학이 인생의 나머지를 편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가르쳤고, 나도 그게 전부라 여겼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난 이후에도 많은 문제들을 겪어야만 했고, 그 종류와 선택지는 전보다 차원이 다르게 넓어졌다. 수업뿐 아니라 인간관계, 진로, 가족 문제까지 우린 더 많은 것을 결정하고 책임을 져야 했다. 그것이 삶은 끝나기 전까지 문제를 계속 푸는 여정임을 배운 첫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문제를 푸는 과정과 '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문제가 계속된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갈지가 정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
내가 어디에도 끼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하면서 그 흐름에 온전히 나를 맡기는 것은 싫었다. 무엇이라고 확실하게는 말은 못 하지만 이것만은 지키고 싶다는 이상한 자존심이 작용했다. 이상하다 생각하겠지만 주류에 뒤처지거나 그것과 싸우는 것은 무섭지만 지는 것도 싫었다. 그렇게 평범하고자 하는 욕망과 비범하고자 하는 욕망 사이를 헤매며, 최선이라 생각하는 방향으로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애매함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보기엔 모범적인 길이지만 그 속에서도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삶, 그게 전부 내가 되었다.
나는 어떤 대학생이 되고 싶었을까? 딱히 없었다. 그냥 막연히 대학생활을 잘하고 싶었다. 그때, 내 앞에 나타났던 사람들이 내 주변의 대학 사람들이었다. 토론 동아리와 학생회, 그들이 고민하고 질문하던 모습은 날 설레게 하는데 충분했다. 지식을 추구하고 있었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난 그것들을 그냥 하고 싶어졌다. 뭐, 그 선택은 내가 가보지 못했던 방향이었기에 용기이자 도전이었다. 그 도전은 아마 지금의 나를 만든 포석 중 하나였을 테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위해 부조리와 싸우고 실천하는 것, 현장을 찾아내고 지키고자 분투하는 것이 당장은 하나의 포석처럼 미미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포석이 큰 나비효과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다른 돌들(타인과의 연대, 나의 지속적인 실천 등)이 이어져 뒷받침한다면 말입니다. 바둑으로 보면, 대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삶을 시작하기 위한 포석을 완성하는 과정입니다. 포석만으로 대국의 향방이 정해지지 않듯, 대학생 이후의 현장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치열하게 자기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커다란 나비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고준우_<대학생은 처음이라>_p 193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결국 사회와 타협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어떻게 해야 합리적인 거래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나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가? 사실 그것조차 불확실하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인지 내가 원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그래서 나와 사회를 불온한 마음으로 들여다보려 노력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 양보할 수 있는 것과 지켜야만 하는 것. 그것들을 탐색하며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