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요가일지] 전 이 정도로 만족해요. 저한테 큰 기대 하지 마셔요.
이번 달 수련비를 내는데 선생님이 이야기하셨다.
" 어떠세요? 이제 4개월 넘게 수련을 하신 건데. 변화를 느끼세요?"
남의 말 이상하게 듣기 1인자인 내 귀엔 또 이렇게 들렸다.
"어떡해요? 벌써 4개월을 수련을 하신 건데 몸에 아무런 변화가 없으신 거 느끼시죠?"
선생님은 내가 워낙에 허리도 많이 굳어 있고, 하체 근력도 부족해서 일주일 2번으론 부족하니 수련을 조금 더 나오거나 집에서라도 시간을 내서 스트레칭이나 요가 동작 중 쉬운 자세는 연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몸에 변화를 느끼려면 '조금 더' 내가 자세 하나하나 성의 있게 꼼꼼하게 노력하고, '조금 더' 자기 몸에 대한 관찰, 또 발견에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번 새로운 3개월은 더 열심히 해보자! 뭐 이런 아주 나이스한 대화였다. 근데 그 '조금 더'라는 선생님의 당부, 기대, 화이팅에 지금의 불어 터진 우럭같이 못난 나는 부응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네네 하고 넘기면 되는데 그날은 또 이상하게 이런 '조금 더, 긍정긍정, 화이팅'에 대한 기대감을 나 따위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 어차피 더 노력 안 할 나라서, 상대방의 호의와 응원에 부응할 수 없으니 빨리 정중히 '거절(반사)'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저는 이게 다예요. 나 같은 건 그냥 버리고 가셔야 해요. 앞으로도 눈에 보이는 큰 발전은 없을 거예요.'
저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요.
전 제가 기특하고 대견해요.
"선생님.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저는 지금 이대로도 제가 너무 기특하고 대견해요. 그래도 4개월 동안 점심시간에 큰 일 없으면 집에 있다가 엉덩이 들고 요가 학원에 나온 것도 전 제가 스스로 대견해요. 저는 아침에 미친년 산발로 노트북 키고 일하다가 그래도 요가한다고 중간에 세수하고 옷 입고 바깥바람 쐬면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것도, 여기서 시체 같은 몸으로 나름대로 용쓰는 이 시간이 좋아요. 저 2년 재택 하면서 정말 집 식탁에서 앉아만 있었거든요. 이렇게 나오는 것도 저한텐 큰 발전이에요. 그리고 핑계겠지만 집에선 솔직히 시간을 내기가 진짜 어려워서요. 회사일 하고 집안일하고 애 보고, 다 그렇게 살면서 하는 거겠지만 저는 지금도 너무 힘들고 벅차서 지금 이것만이라도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 선생님은 당황하셨을 것이다. 수련 후에도 몸이 여전히 뻣뻣하고 힘이 안 붙는 학생에게 같이 열심히 파이팅하자 라고 가볍게 말씀하셨는데 막대기처럼 뻣뻣한 주제에 사지에 힘도 하나 없는 해파리 같은 수련생이 주둥이 근력은 살아서 구구절절 자기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그나마 이것도 본인의 최선이라고 블라블라 말이 많기도 많다. 정말 피곤한 스타일. 나도 안다. 근데 이놈의 입이 멈추질 않는다. 왜 이놈의 입은 지치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가. 내 유연성과 근육은 입에만 모여있나 보다.
사실은 내 선에서 무리하지 않고 요가를 다니려는 계기가 있었다. 요가 4개월 차가 되었을 무렵, 남편이 우리 집 식탁에 널브러진 내 중국어 교재를 보고 말했다.
"너 요가도 하고 있고.. 중국어도 한 2년 배우지 않았냐? 시험 같은 건 안 봐?"
남의 말 꼬아듣기 1등 정신병 와이프, 또 병 도졌다. 맞다. 나 뭐 많이 배운다. 나 월요일 수요일마다 중국어 온라인 수업받은 지 2년이 넘어간다. 같이 공부하는 멤버 중에 벌써 HSK4급을 딴 사람도 나왔다. 하지만 난 시험 계획도 없다. 시험 기출 문제지를 살짝 보긴 했는데 아우, 난 아직 멀었다는 느낌이다. 난 질문도 없고, 적극적으로 말도 많이 하지 않지만 수업을 거의 빠지지 않고 학원비 첫빠로 내는 그런 학생이다.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다. 무언가 '비기너'로서 배우는 거 자체를 좋아하는 천상 모범생. 근데 일등은 아니고 그냥 앞자리 앉아서 하이테크로 필기 열심히 하는 그런 애. '안 놀고 무언가 배우고 있다.' 자체에 도취된 사람. 시험이나 자격증 같은 거, 스스로 내 배움에 대한 수준에는 관심도 없고 오히려 두려워하는 사람.
그래 나 맨날 뭐 배우긴 하는데
남는 거 없는 사람이다.
중국어도 2년 넘게 배우고 요가도 꽤나 열심히 하고 있네? 하는 남편의 그 말이 그날은 굉장히 거슬렸다. 출산과 육아 후 내 삶의 질을 따진다고 빠듯한 형편에 중국어도 돈 내고 배우고 있고 요가도 배우고 또 요새는 작사 배운다고 수요일 저녁은 통으로 남편한테 애를 맡기고 있다. 사실 이 전에는 원래 전공이던 러시아어도 과외도 받았고, 영어도 남편이랑 배웠었다. 솔직히 지금도 시간이 더 있다면 동양화도 배우고 싶고, 옷 만드는 재봉도 배우고 싶다. 전생에 못 배워서 교실 창문 밖에서 얼어 죽은 언년이었나. 결과물 없는 배움, 목표가 없는 배움, 배움 자체가 너무도 즐겁지만 사실 내 형편에 너무 사치고 욕심이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도 돈이지만 애 있는 엄마가 무언가를 배울 때 그 시간만큼 나 대신 애를 봐주는 가족들의 희생에 떳떳하지 못하다. (중국어랑 요가는 점심시간에 배우는 거지만) 이렇게 배우고 있으니 시험 성적표, 자격증도 따서 보이고, 다리도 쫙쫙 찢고 거꾸로 머리 서기라도 하면 가족들 앞에서 좀 당당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들은 몇 개월 배워서 요가 강사 자격증도 따고 자랑도 하던데, 남들은 두 달 만에 중국어 시험도 보고 이력서도 채우던데 나는 지금 무슨 팔자 좋은 문화센터 놀이냐. 남편이 보기에 답답할 수도 있겠다. 이왕 돈 들여 배우는 거 좀 느슨한 태도를 바꾸고 자격증이나 눈에 보이는 변화를 좀 보여서 가족들한테 인정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호기롭게 다음 날 점심 요가를 예약했다. 근데 바로 그날 아침,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그 전 주말 바우처 덕에 신라호텔에서 뷔페를 무리해서 먹고 왔는데 그게 탈이 났는지 (안 먹어보던 것을 작정하고 너무 먹어서 그런가) 남편과 내가 장염기가 올라왔다. 오전 내내 화장실을 들락날락하고 온 몸에 수분과 기운이 쪽 빠진 상황. 오전 요가를 취소할까 했지만 어제 남편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그래, 어렵게 귀하게 시간 내서 배우는데 하려면 제대로 하자! 평소 나답지 않은 다짐을 하게 되었다.
'요가 하루 빠지고 싶고, 열심히 하기 싫어서 스스로 더 아프다고 느낄지도 몰라. 요가학원까지 걸어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고 이게 다 돈이고, 가족의 희생인데 쉽게 포기하면 안 되지. 일단 가자'
물에 젖은 거적때기 같은 몸을 들어 요가 학원에 갔는데 또 그날따라 하체 조지기 자세들만 계속하는 게 아닌가. 옆에 있는 수련생은 어느 정도 따라가는데 나 혼자 부들부들, 휘청휘청, 또 호흡이 딸려 머리가 어지러워 벽에 머리 대고 기대 있지를 않나, 1초 정도 자세 유지하다가 무슨 뜨거운 물에 댄 마냥 아이고 죽겠네 하고 팔딱거리는 쇼를 하지 않나, 또 집중 못해서 선생님이 구령하는 자세 이름을 다 까먹고 두리번두리번 남 하는 것을 보고 그제야 자세를 잡는다거나.. 총체적 난국.
아 오늘 같은 날은 오면 안 됐었구나. 나도 난데 나 때문에 원래 호흡대로 수업이 안되고 있구나. 나는 왜 이렇게 미련할까. 왜 굳이 와서 남들한테 민폐 끼치고 나 스스로 병을 키울까. 스스로 화딱지가 나는 상황에 선생님의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간다. '이제는 매번 설명할 수 없다. 이정도 했음 기억해야 한다. 본인이 자세를 다 챙겨야 한다' 등등 당연히 하실 수 있는 말씀을 하는데 요가 매트 위에서 죽을 둥 살 둥 하는 나에게 그 말씀이 또 너무 야속하고 서러운 거.
울었다. 펑펑 울었다.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울었다. 아르다 자세 하면서도, 부장가 하면서도 선생님 시선에 내 정면 얼굴이 보일 텐데 주체를 못 하고 얼굴에 눈물이 범벅되도록 울었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그리고 내가 한심하고 미련해서 울었다. 아마 선생님도 내 우는 얼굴을 보고 놀라셨는지, '버텨야 한다. 당연히 힘들다. 참아내야 한다' 라는 말응 하시다가 "평소에 나를 몰아 붙이더라도 요가하는 이 시간만큼은 나를 기다려주자" 하는 온화한 말씀으로 모드를 바꿔주셨다 화장실 가서 찬물로 세수하고 코를 펭 풀고 거울 보면서 또 우는 내 얼굴 한참 봤다.
살던 대로 살자
또 한 번 깨달았다. 갑자기 변할 수가 없다. 살던 대로 살자. 갑자기 야무져서 열심히 해보려 하지 말고 나답게 느슨하게, 출석도장 찍는데 의미 두는 학생이 되자. 이렇게 2년 3년 5년 10년 하다 보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허리가 펴져 있겠지. 요가를 안 하던 4개월 전의 나는 점심시간에 라면 먹고 누워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래도 나와서 걷고 스트레칭이라도 하니까 좋아진 것 아닌가. 그냥 이렇게 의미 부여하고 만족하며 살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서른여섯 먹고 요가학원에서 펑펑 운 경험으로 나는 결심했다. 나는 내 쪼대로 간다. 난 이게 다다. 나에게 '조금 더'는 없다. 이대로 유지만 해도 잘한 거다. 내가 발전이 없어 보람은 못느낄 학생이언정 현실적으로 요가 학원과 중국어 선생님한테도 그리 나쁜 학생은 아닐 거다. 장기 고정 수입원으로 봐도 되는 학생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