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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딜러 한혜미 May 05. 2020

숨겨진 미술, 이야기

미술을 이용했던 정치가 '나폴레옹'과 '신고전주의 미술'

나폴레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젯밤 아트플랫폼 sharp spoon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보기: http://sharpspoon.kr/interview_detail?id=21




원하는 장면을 놓치고 싶지 않을 때, 오늘날의 우리는 휴대폰을 꺼낸다. 계절의 아름다움과 여러 명소들, 때로는 태어난 아이의 성장과정까지 각자의 취향을 손바닥 정도의 작은 기계에 고스란히 담는다.


과거의 사람들은 어땠을까. 

휴대폰 이전에 과거의 필수품은 카메라였다. 카메라의 파급효과는 굉장했다. 사진과 같은 사실적인 그림에서, 사진으로 남길 수 없는 모네와 고흐 같은 거친 화풍을 등장시켰다. 카메라의 등장으로 당시 화가들은 더이상 사진과 같은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졌다. 그들은 신과 왕에 대한 존경보다는 그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문화를 향유하기 시작했다.

 



좌) 자크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우)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그래서일까. 카메라가 등장하기 전의 작품을 바라보면 감탄을 금치 못한다. 실제로 보고 그린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정교하고 생생하다. 명암과 색채로 표현한 피부결은 매끈한 등선에서도 근육과 뼈가 느껴지게 하며, 천의 질감은 푹신해 보일 정도로 사실적이다. 이런 정교한 표현방법과 여백의 처리는 전체적으로 엄숙하면서도 진중한 분위기이다.


약 300여 년 전, '신고전주의 미술'은 역사와 신화를 바탕으로 사실적인 묘사가 더해지면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귀족을 위한 화려한 미술에 등을 돌린 대중들에게 신고전주의 미술은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18세기 말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던 이 사조의 중심에는 대표적으로 다비드 앵그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를 주도했던 정치가도 있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The word impossible is not in my dictionary)'


한 번쯤은 들어봤을 명언이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그는, 오늘날까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빼어난 정치가라는 사실에는 이견을 둘 수 없다. 약 300여 년 전의 행보가 오늘날까지 명언과 업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니, 정치가를 넘은 역사적 인물이다. 지중해의 작은 섬 소년에서 유럽을 제패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의 이야기이다.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남긴 작품을 통해 우리는 나폴레옹이라는 한 사람의 이미지를 받아들였다. 전쟁에서의 용맹함, 군주의 카리스마는 그를 대면하지 못했음에도 연상된다. 신고전주의의 대가 다비드와 앵그르가 그린 주인공이자 미술을 이용했던 정치가, 나폴레옹을 작품으로 만나보자.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Le Premier Consul franchissant les Alpes au col du Grand Saint-Bernard)>




자크 루이 다비드(David, Jacques Louis, 1748~1825)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놀란 말 위에서도 잃지 않은 카리스마와 평정심은, 용맹함을 넘어서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당시 나폴레옹의 궁정화가였던 그는 이 작품으로 충성도를 비췄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군대를 무찌르게 위해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의 협곡을 힘차게 오르는 모습이다. '전쟁의 신' 나폴레옹은 경사진 알프스 산맥과, 놀라서 앞발을 거칠게 올린 말도 막을 수 없다. 침착하고 당당함을 잃지 않은 여유로운 모습에서 그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그림 속의 나폴레옹은 침착함을 넘어서 손을 위로 뻗었다. 이는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로 추측할 수 있는데, 그들의 방향을 안내하듯 불어오는 바람까지 그를 돕고 있다. 당시 나폴레옹은 당대 최고 권력자로 황제가 되기 전이었다. 위험한 전쟁에서도 늘 선두에 나서서 병사를 지휘했는데, 이런 일화로 비추어보는 다비드의 그림은 신뢰감 있는 군주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그림의 하단을 보면 힘겹게 올라가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나폴레옹과 다르게 매우 힘들어하는 표정이다. 바닥의 돌은 나폴레옹의 성 보나파르트(BPNAPARTE)와 함께, 알프스를 정복한 영웅들의 이름(HANIBAL, KAROLVS MAGNVS)이 적혀있다. 다비드가 이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현실은 어땠을까. 알프스를 넘는 일은 그림과 다르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0만 명의 군사가 3만 명으로 축소될 정도였다고 하니, 넘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병사들의 처참하고 끔찍한 모습이 짐작된다.





폴 들라로슈, <알프스 산맥을 건너는 보나파르트(Bonaparte Crossing the Alps)>




약 50년 후에 프랑스의 화가인 폴 들라로슈(Hippolyte Delaroche, 1797~1856)가 그린 나폴레옹의 모습은 조금 더 현실적이다. 역사화와 초상화를 잘 그렸던 그의 작품은 다비드와는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나폴레옹이 탄 말이다. 본래 나폴레옹은 가파른 협곡을 오르기에 어려움이 있는 말이 아닌, 노새를 탔다고 알려졌다.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노새의 위로 나폴레옹의 모습도 누추해 보인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손 위치도 현실적이다. 평소 나폴레옹은 위가 좋지 않아서 배를 자주 만졌다고 알려졌는데, 그림 속의 모습에서도 배에 손을 올렸다. 영웅이 아닌 인간적인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현실적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다른 버전들





영웅이 되고 싶은 야심가였던 그는 다비드의 작품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모습이야 어찌 되었건 자신이 남기고 싶은 이미지를 표현해주었으니, 어찌 총애하지 않을 수 있을까. 본래 이 작품은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가 친선의 의미로 다비드에게 주문한 초상화였는데, 그림을 보고 만족한 나폴레옹도 추가적으로 3점을 더 주문했다. (다비드 스스로가 한 점을 더해서 총 다섯 점이 그려졌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The Coronation of Napoleon)>




전작인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으로 나폴레옹의 취향을 '저격'한 다비드이다. 그가 그린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역시 현실을 모두 반영한 그림은 아니었다. 


그는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약 200여 명의 사람들로 화려하면서도 웅장하게 표현했다. 황제를 위해 격식 있게 갖춘 인물들의 의복에서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그들 대부분은 조세핀의 머리에 왕관을 씌어주는 나폴레옹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나폴레옹의 취향이 반영된 그림이었다. 그 당시 다비드는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쓴 나폴레옹을 그리려고 했으나, 주변의 항의로 위의 모습과 같이 변경했다고 알려진다. 그림의 뒤편 중앙에는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앉아있다. 당시 나폴레옹의 어머니는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다비드는 마치 그녀가 아들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지켜보듯 화면의 중앙에 그렸다.


이렇게 다비드는 프랑스의 역사를 그의 해석으로 화폭에 다르게 담으면서 부와 명성을 얻었다. 나폴레옹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자, 용맹함을 갖춘 영웅으로 만들었다. 훗날 그는 나폴레옹이 최후를 맞이하자 프랑스에서 추방을 당한다.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프랑스의 회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음에도 예술을 도구로 이용한 화가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Napoleon on his Imperial throne)>




신고전주의 대가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도 그림을 통해 흔들림 없는 군주의 모습을 표현했다.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던 스승 다비드의 제자답게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사실과 같이 정교하게 화폭에 담았다.


앵그르의 작품 속 나폴레옹은 체격이 매우 건장하다. 키가 작았다고 알려진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나폴레옹의 카리스마와 화려한 옷에서도 감춰지지 않은 건장하고 강인한 이미지를 그렸다. 폴레옹의 권위를 넘어서 황제의 신성한 이미지룰 표현했다. 다비드의 제자임을 고려한다면,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우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보나파르트, 제 1집정관(Bonaparte, First Consul)>




앵그르는 이미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 이전에 <보나파르트, 제 1 집정관>으로 나폴레옹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의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기 전이었다. 오스트리아 군대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던 도시에서 후원자인 나폴레옹을 기념하기 위해 앵그르에게 의뢰해서 그려진 것이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그리는 앵그르답게 작품 속의 나폴레옹은 강인하고 진중한 이상적인 정치인이다. 나폴레옹의 뒤로는 성당이 있는데, 교회와 정치의 화합을 위해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앵그르는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까지 작품세계를 이어나갔으며, 나폴레옹은 그에게 명성을 주었다. 정치적으로 예술을 사용하려는 정치가와, 그림이 출세의 수단이 되었던 시대의 합이 맞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등장부터 몰락까지, 앵그르는 세상의 혼란을 직접 경험했다. 그가 혼란스러운 세상보다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동경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마치 그 시절 포토샵의 대가와 같은 그의 그림은 이상적이고 창조된 미가 담겨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 <튈르리의 서재에 있는 나폴레옹 황제(The Emperor Napoleon in His Study at the Tuileries)>




만약 카메라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그림으로 당대의 권력가를 표현한다면 우리가 아는 정치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을지 문득 궁금하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미술을 영리하게 이용했다. 그는 미술로 표현하는 초상화와 역사화가 자신의 세력을 결집시키는데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림을 통해 전쟁 속의 용맹스러운 영웅이자, 근엄하고 든든한 황제의 모습으로 세력을 구축했다. 이러한 행보는 신고전주의 미술을 유럽 전역에 빠르게 전파했다. 아마 그가 미술을 정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다면 역사 속에서 다비드와 앵그르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를 담으려고 했던 수많은 예술가들을 만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정치와 예술의 결합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주시하며 생각해야야 하는 부분이다. 승자가 기록되는 역사책에서는 신고전주의 미술의 등장으로 무엇을 놓쳤는지 알 수 없다. 정치가를 찬양하는 예술의 발전이 당시 미술의 발전을 촉구했는지, 퇴행시켰는지는 확답이 어려운 이유이다.


나폴레옹은 도전정신과 포기를 모르는 상징적인 인물이자 수많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독재자로 기록되었다. 만약 다음 후대에 나폴레옹과 신고전주의 미술가들의 평가가 다시 이뤄진다면, 그들은 어떤 인물로 비치게 될까. 예술은 수학과 같이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나누기 어렵다. 확실한 건 그 당시 그들이 그린 작품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가 기억되는 것이다.

'미술을 이용했던 정치가, 나폴레옹은 이러한 사람이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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