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어김없이 나는 끼여있었다. 앞사람의 백팩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않아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내 팔과 가슴과 배에 밀착되어 있었고, 뒷사람의 호흡은 계속 내 귓가로 내리 꽂혔다. 훅 훅 훅 훅. 규칙적이고 따뜻한, 그래서 불쾌한 호흡이 계속 이어졌다. 음 이 정도면 맥박이 얼마인지 유추할 수 있겠는데? 아 호흡 수로 맥박을 어떻게 재지? 대략 호흡수 x3.5를 하면 맥박이 나오려나? 이거 찾아보면 나올 것 같은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인터넷에 ‘호흡수와 맥박의 상관관계’을 검색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핸드폰을 사용하려면 손을 들어 올려야 하고, 그럼 하는 수 없이 앞사람의 백팩을 찢어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어폰을 끼면 해결될 일이었다. 내 새끼들 노래와 함께했다면 뒷사람의 호흡이고 맥박이고 간에 행복 해졌을 텐데.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9호선을 타고 출근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바짝 긴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안내 음성 하나라도 놓칠세라 음악도 들을 수 없었다. 이미 여러 차례의 지각으로 얼룩진 근태였지만 더 더럽힐 수는 없었기에 뒷사람의 호흡 정도는 참겠노라 생각했다. 손을 사용할 수 없게 꽉 붙잡힌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건 안면 근육뿐이었다. 마스크 아래로 입술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마스크가 함께 들썩였다. 마스크가 묘하게 불편하게 위치해버렸다. 다시 입을 오물오물 움직여 마스크를 조정했다. 그다음은 눈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보지 않을 때 내 눈은 대개 지하철 광고 전광판을 향한다. 그보다 시선을 더 아래로 두면 다른 사람들의 핸드폰 화면을 훔쳐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저 눈앞에 있으니 보게 된 건데 왠지 내가 도둑처럼 훔쳐보는 구도가 되어 화들짝 시선을 피한다. 그렇게 이리저리 도망친 시선은 결국 전광판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도망치던 시선이 앞사람의 안경에 안착했다.
백팩도 커다랗더니 (여전히 내 팔과 가슴과 등에 맞닿아있다) 안경도 되게 두껍네.
그런데 기묘했던 건 내 시선의 방향이었다. 앞사람과 마주 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 뒤편에 꼭 붙어있다 보니 그 사람의 안경을 안에서 밖으로 바라보는 방향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은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 체험하는 구도였달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의 뒤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는걸. 핸드폰 화면을 훔쳐보기 싫어서 도망쳐왔는데 이젠 남의 시선까지 훔쳐보게 되었다. 이게 더 실례인 듯하였으나 이 기묘한 시선은 거둘 줄을 몰랐다. 신기했다. 내 시선이 내 안경에서 한 번, 그리고 앞사람 안경에서 또 한 번 굴절되어 세상이 두 배로 휘었다. 휘어진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우스꽝스럽게 일렁거려 나를 말랑하게 만들었고, 나는 픽-하고 웃었다.
그렇게 내 시선은 계속 일렁 말랑 일렁 말랑이며 지하철 문에 붙은 ‘기댐 금지’ 표지판에 닿았다. 표지판 속에서는 어떤 사람이 지하철 문에 슬쩍 기대고 있었고, 그 위로 굵고 새빨간 줄이 대각선으로 직 그어져 있었다. 이게 지하철 문에 기대지 말라는 뜻이라는 걸 모를 리 없는 한 청년이 표지판 바로 옆에서 문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에 몸을 뭉그러트리고 있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문 앞에 서있는 건 복불복이다. 예상외로 여유롭거나, 예상한 대로 압력 밥솥의 상태이거나. 그 청년의 표정으로 짐작해보건대 그날은 압력 밥솥 그 자체인 날인 게 분명했다. 그것도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직전 상태. 그 청년은 바로 앞에 서있는 여성 분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입에 들어올세라 고개를 홱 돌린 채 몸을 뭉그러트리고 있었다. 미간에는 바짝 긴장한 근육이 뭉쳐있었다. ‘기댐 금지’ 표지판을 서울 지하철에 대입하면 이런 그림이 그려지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 위로 굵고 새빨간 줄을 그을 수 없었다. 차마 그럴 순 없었다. 대신 굵고 새빨간 줄을 그 청년의 머리 위에 가로로 그어보았다. 게임 속 체력바(HP bar)가 되었다. 그 줄 위로 빨간 줄을 더 덧대어 체력바를 통통하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휘어진 세상 속에서 그 청년도 말랑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