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이 1인칭에게 알려줘야만 알 수 있는 것
출근길에 객실 내 응급 환자가 발생하여 열차 운행을 잠시 멈춘 적이 있었다. 다들 고개를 푹 숙이고 모른 채 하는 듯 보였으나, 속으로는 큰일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핸드폰 스크롤을 내리는 바쁜 손가락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몸짓이나, 서로 밀치고 밀리는 움직임들이 주변을 소란스럽게 감싸고 있었는데, 일순간 머리카락 한 올도 움직이지 않는 고요함으로 바뀌어있었기 때문이다. 이 걱정스러운 마음들이 호르몬 물질처럼 각자의 몸에서 분비되어 한데 모여서는 그 사람에게 가닿기를 바라며 나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나는 지하철을 탈 때면 시점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누군가의 시선을 빌려보는 것이다. 내 앞에 앉은 양복 차림의 아저씨와, 그 앞에 서서 졸고 있는 대학생과, 방금 닫힌 문으로 간신히 뛰어들어온 여자와, 꽉 찬 노약자석 앞에서 짐을 들고 어정쩡히 서있는 할머니의 눈으로 이 지하철 풍경을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이 생각들은 꽤나 편향적이고 매우 단편적인 상상에서 멈춘다. 시점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내가 경험한 여러 시점은 상대가 내놓은 파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상대의 시점을 온전히 빌려볼 수 없다.
아쉬움이 들 때면 기관사의 시점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1인칭 시점에 머물러 있는 우리와는 달리 3인칭 관찰자 시점을 가졌다. 그래서 객실 내 응급 환자가 발생했다는 사실도 1인칭 우리들은 몰랐지만 3인칭 기관사는 알 수 있다. 내가 기관사 시점을 처음 의식한 건 아슬아슬하게 문이 닫히기 직전 지하철에 올라타기를 여러 차례 성공한 때였다. 처음 몇 번 성공했을 때는 나의 달리기 실력이라 여겨 허벅지를 몇 차례 두들기며 뿌듯해했고, 그다음 몇 번은 나의 기가 막힌 운이라 여겨 그날은 운수 좋은 날이라며 기뻐라 했다.
그런데 그날은 내가 뛰어 올라타자마자 등 뒤에서 지하철 문이 닫히는 게 내 달리기 실력과 운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의심스러웠다. 이건 타이밍이 너무 기가 막히잖아. 이 정도면 각본도 있고 감독도 있는 휴먼 드라마라고. 그제야 뭔가 떠올랐다. 얼른 인터넷을 켜 검색해보니 지하철에도 CCTV가 있단다. 나만 몰랐나 싶었을 때 '지하철 문 닫히고 CCTV에 싹싹 빌면 지하철 문 열어준다는데 진짜인가요?'라는 지식in 질문을 보고 용기를 얻어 더 검색해보았다. 한 기관사의 인터뷰에 "가끔 출근길에 허겁지겁 뛰어오시는 분들을 위해 문을 조금 더 열어두긴 하지만 위험하니까 뛰어오시지는 말아주세요"라고 적혀있다. 오 마이 갓. 그럼 그동안 나의 출근길 뜀박질 역사를 모두 보고 계셨단 말인가요? 제가 얼마나 추잡스럽고 허덕이며 뛰어왔는데요. 거의 k-좀비처럼 머리가 산발이 되어 뛰어왔다고요. 아침부터 그 꼴을 보시게 했다는 것에 갑자기 죄송한 마음이 울컥 든다. 제 맘 알죠, 기관사님?
하지만 기관사의 은총은 날마다 오는 건 아니었고 가끔은 내 허벅지가, 또 가끔은 내 운이 나의 지각을 막아주곤 했다. 어쨌거나 그날 이후로 나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플랫폼에 달려있을 CCTV와, 그 뒤에 계실 기관사와, 기관사가 지켜볼 사람들과, 그들의 수많은 시점에 대해 종종 생각했다. 그리고 그 시점들은 제각각 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고 결코 같은 모양이 될 수 없기에 부닥치게 되는 일들을 생각했다. 만약 객실 내 응급환자가 발생해서 열차가 멈춘다는 안내 방송이 없었다면 우리는 크게 화를 냈겠지. 3인칭이 알려주지 않으면 1인칭은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