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식탁> 기고글(2023 평범을 산 비범한 이야기)
https://www.firenzedt.com/news/articleView.html?idxno=30498
'갑 중의 갑'인 국회의원실에서 비서로 일하다 퇴사 후 올해 초 '을 중의 을'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하필, 한겨울. 요령 좀 찾아보고 시작할 걸. 춥다. 고양시 일산 라페스타, 불경기에 코로나까지 겪고 나니 동료이자 경쟁자인 대리기사가 손님보다 많다. 콜을 받으려면 타짜처럼 손이 눈보다 빨라야 하는데 스마트폰 터치 장갑이 없으니 손이 얼어 콜을 자주 놓친다. 안락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기후위기 시대 노동자에 관한 기사를 읽을 때는 체감하지 못했는데 한겨울 칼바람 귀싸대기를 맞으니 공중화장실 변기마저 포근한 소파 같다. 해외여행이 아니라 대리운전으로는 처음 찾은 영종도, 장거리를 뛴 터라 상가건물 화장실을 찾았는데, 잠겼다. 용량이 작은 방광을 물려준 조상님과 유전자를 원망하며 중얼거린다. “아, 대한민국, 야박하네~.”
아, 겨울은 그래도 양반이었다. 한여름이 되니 등에 ‘소금꽃나무’가 피는 걸 감추려고 흰 면티 위에 얇은 셔츠를 걸친다. 하지만 영화 <기생충>처럼 육체노동자 계급의 땀내까진 감출 수 없다. 늦지 않으려고 빨리 걷거나 뛸수록 몸은 땀과 냄새에 젖고 존재 자체도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발목 양말은 왜 신은 걸까. 경의선숲길 나무 옆 벤치에서 대기하는 1분 사이 암컷 모기 다섯 마리의 건강한 출산을 위해 고단백 피를 헌혈했다. 곤충도 사람도 번식과 생존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고충이 어찌 물리적 환경에만 있으리오. “아다리가 맞으면 또 만날 수 있는 거냐”며 작업(?)을 거시는 막내 이모뻘 손님은 귀여운 편. 양해를 구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는 손님, 타자마자 보란 듯 조수석 대시보드에 발을 올리는 30대 직장인, 거리낌 없이 “왜 이런 일 해요?”라며 묻는 중년 아저씨, 현금이 없어 이체하겠다고 하고 다음날에도 전화를 안 받는 고급 외제차 청년, 인천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대중교통이 끊길 무렵 강남 논현 콜을 받아 기분 좋게 경인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자기 집은 인천 논현동이라며 차를 돌리라는 사장님, 콜을 여러 개 부르고 먼저 온 기사와 떠나버리는 사람, 집으로 가는 올빼미버스(심야N버스)도 포기하고 잡은 콜인데 출발지에 도착해 전화하자 끊어버리는 사람….
이렇게 하루를 마치고 몸도 마음도 녹초가 돼 집으로 돌아오면 보통 곯아떨어진다. 텅 빈 건 위장만이 아니어서 알 수 없는 허전한 마음에 책상 앞에 앉아 검은색 모니터를 마주하고 캔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일본 단편소설집 《호로요이의 시간》 중 <식당 ‘자츠’>편 주인공 사야카가 “솟구치는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맹렬한 속도로 맥주와 함께 밥을 먹는” 장면처럼.
그럼에도 버틸 수 있는 건 세상엔 진상보다 따뜻한 보통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 실수와 사고가 잦기 쉬운 출발 시점에 “천천히 준비하세요.”라며 긴장을 풀어주는 사람들, 추운 날 미리 준비해둔 캔 커피를 운행이 끝날 때 조용히 건네는 손님,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가는 길 헤맬까 직접 길을 안내해주는 사람들. 꼬깃꼬깃한 지폐(팁)에 담긴, 적선과 시혜가 아니라 힘든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연대와 격려에 가까운 마음. 그리고 “아빠 부엌에 밥 있으니까 밥 먹어.”라고 쪽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잠든 초등생 딸내미, 말없이 안아주고 격려해주는 아내. 이 마음들 덕분에 한 해도 살아낼 수 있었다.
대리운전 기사 박광호 씨 수고했어요. 심야에 퇴근하고도 아침식사를 척척 준비하고 아이의 등하굣길도 챙긴 가사·돌봄노동자 박광호 씨도요. 바쁜 와중에 아내와 함께 《호로요이의 시간》도 출간한 출판노동자 박광호 씨도요. 당신의 노동은 소중했습니다. 2024년 새해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