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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유나 Oct 19. 2021

나의 작은 도서관

Book

 지난 주말에 내가 갖고 있는 책이 몇 권인지 엑셀로 정리했다. 먼저 장르별로 나누고 제목, 작가, 출판사 명을 기재했다. 그렇게 세어 보니 총 290여 권을 가지고 있더라. 그중에서도 한국 문학이 가장 많았다.


 언제부터 책을 모으기 시작했을까? 엄마가 사서로 일한다고 하면 보통 집에도 도서관처럼 책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다른 집은 모르겠 우리 집은 예외였다. 엄마는 거의 모든 책을 빌려서만 봤다. 이건 엄마의 책 구매 철칙 때문이기도 했다. 엄마는 다 읽고 나서도 세 번 정도 또 읽고, 반드시 소장해야겠다 싶은 것만 사라고 했었다. 덕분에 우리 집의 책장은 5단짜리, 그중에서도 아래 3단은 문으로 여닫을 수 있는 수납장이었기 때문에 위에 2단만 책이 꽂혀 있었다. 거기 뭐가 있었더라. <작은 인간>, <삼국지>, <해리포터 시리즈>였을 것이다. <해리포터>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나의 글쓰기의 시초가 되어준 책이기도 하니 훗날 더 자세히 이야기할 예정이다. 어쨌든 이 시기에 내 돈으로 산 책은 문제집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점에 자주 가지도 않았고 뭔가 사고 싶어도 엄마가 다 빌려오거나 사지 못하게 하니 애초에 책을 사는데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이런 내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찾아오는데 바로 '가출'이다. 엄마의 신경질을 견디지 못한 나는 스무 살이라는 나이에 가출을 감행했다. 미리 봐 놨던 싼 값의 고시원으로 곧장 향했는데 그곳이 정말 이루 말할 것 없이 열악했다.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바닥, 다 부서져 가는 나무문, 겨우 열쇠 하나뿐인 잠금장치. 하필이면 또 겨울에 집을 나와서 온수를 쓰고 싶으면 실장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옆 방과 나눠 쓰는 반쪽짜리 창문에선 바람이 솔솔 샜다. 보일러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지 바닥 군데군데가 얼음장처럼 찼다. 그 시기에 나는 해가 뜰 때 잤고 해가 질 때 일어날 정도로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모두가 잠든 밤중에 홀로 말똥말똥 깨어 있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다. 밤에 천천히 잠식당하다가 종국에는 질식해 버리고 말 것 같았다. 씻지도 못하고 극세사 이불속에서 오들오들 떨던 나는 극도의 무료함과 지루함과도 싸워야 했다. 드라마도 모두 끝나고 그렇게나 두려워하던 화면조정시간이 찾아 문득 지인이 추천하고 빌려준 책이 생각나 읽기 시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였다.


 다시 읽어도 그런 기분이 들까? 와타나베와 나오코, 미도리의 만남이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그들의 마음 상태에 이입하며 읽었다. 중반까지 읽다가 밑줄을 치고 메모를 하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싶어 아침이 오자마자 근처 서점으로 달려갔다. 얼마 있지도 않은 돈으로 밥도 아니고 책을 사다니, 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가.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이후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의 '최애' 소설가가 되어 출간된 책은 족족 사들였다. 책을 사려면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낡고 해진 고시원을 나와 조금 더 안정적인 공간에 들어가 돈을 벌기 시작했다. 하루키를 시작으로 요시모토 바나나에게도 푹 빠졌었다. 지금은 일본문학에 대한 애정은 좀 낮아졌고 대신에 한국문학에 빠졌다. 내가 파악한 한국문학은 태생적으로 아픔과 상처가 내재되어 있는 장르였다. 어린 시절의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이라는 키워드에 깊이 몰입했던 것처럼 지금은 한국문학이 가지고 있는 어떤 통증에 깊이 파고들고 싶다. 어쩌면 비슷한 맥락일지 모른다.


 지금의 나는 매달 6권 내지 7권의 책을 고정 비용으로 지출하고 있다. 생각보다 적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월세와 관리비가 꾸준히 나가는 자취생으로서는 비용이다. 언젠가 큰 거실을 갖게 되면 TV 대신에 책장을 사서 여태까지 산 책들을 종류별로 꽂아둘 것이다. 산 책을 한번에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을 하다 보니 물리적인 시간이 없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지쳐있을 때면 글자 한 자도 읽기 귀찮을 때가 있다. 그렇게 사놓고 읽지 못하는 책도 분명 있다. 언젠간 읽겠지 하며 미뤄둔 책들이다. 그러나 나는 책을 또 잔뜩 샀다며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을 것이다. 난 우리 집이 나만의 도서관이 되길 바란다. 빠르게 읽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내가 대여할 책들이 가득한 곳. 하루하루 반납일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무한정 이해해주는 아량 있는 사서가 운영하는 도서관.

 

 나의 거실에 마련된 나만의 작은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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