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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랄라 Aug 01. 2023

오래된 꿈과 내일

'쫌 살아보니 쫌 더 잘할 것 같습니다'-들어가는 글

  삶은 어찌 보면 수많은 선택의 연속.

하지만 그 많은 선택을 자기 뜻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떤 선택은 너무 어려서 부모님이 대신해주고, 어떤 선택은 너무 어려워서 더 많이 아는 사람의 뜻에 따르고, 어떤 선택은 남들의 시선만을 좇다가 원하지 않는 결정을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선택은 남을 배려하다가 정작 내 선택이 아닌 선택을 하기도 하고, 어떤 선택은 정말 운명의 장난에 휘둘리기도 하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저 학교 가는 게 좋고 그냥 선생님들이 좋았다. 내 놀이터는 학교 운동장이었고, 나의 만물박사는 모든 선생님이셨다. 그래서 나는 막연히 나중에 선생님이 되어서 코흘리개 아이들을 가르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영화 '내 마음의 풍금'에 나오는 이병헌 배우처럼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칠판 앞에서 산수도 가르치고 풍금도 치고 아이들과 짓궂은 장난도 치는 멋진 선생님!  하지만 대학을 선택할 때 아버님에게 왠지 선생님이 되겠다는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하여간 그땐 그랬다. 왜 그랬냐고 물어봐도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냥 그 시절 그 분위기에선 부모님이 바라는 그런 직업을 가져야 했고 그래서 바람과는 다른 과를 선택해야만 했었다.


  어렸을 때부터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부러웠다. 심지어 미국 사람이 미국말을 해도 난 그게 부러웠다. 그래서 더빙이 되어 나오는 TV의 '주말의 영화'보단 직접 극장에 가서 영화 보기를 즐겼었다. 대학에 들어가선 영어, 일어, 중국어 학원을 자주 다녔지만, 그만큼 또 자주 그만두기도 했었다. 영어든 일어든 뭐라도 외국어 하나쯤은 폼나게 하고 싶은데 능력과 끈기는 나와 친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국어를 잘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카투사 입대였다. 아무리 바보에 게으름뱅이라도 2년 넘게 영어만 하는 미군들과 미군 부대에서 부대끼다 보면 영어는 웬만큼 할 것이라는 철석같은 믿음을 가지고 카투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기초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가보니, 내가 배치된 부서는 전원이 카투사로만 구성된 카투사 인사과였다. 잠도 카투사끼리 한 방에서 자고, 온종일 카투사들하고만 일하니 영어를 쓸 일이 전혀 없었다. 내가 쓰는 영어는 어쩌다 마주치는 미군들과 하는 인사 ‘What’s up?‘이나 ’How’re you doing? ‘정도였다. 후임병들마저 ’팀 스피릿‘ 같은 한미 합동작전에 나가서 멋지게 통역을 할 때, 영어가 서툰 난 병장 계급을 달고도 막사 보초나 설 수밖에 없었다. 세상살이가 참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해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외국에서 살아보기! 짧다면 짧은 삶을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들하고만 사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또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다른 삶이 있는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해마다 아내와 해외여행을 다녔지만, 직장 일 때문에 길어야 1주일밖에 못 해 보는 외국 여행은 말 그대로 생활이 아닌 여행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래서 삶이 힘들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바로 외국살이였다.    

 

  50대 중반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퇴직과 은퇴를 생각하게 되었다. 쫓기듯이 준비 없이 맞는 인생 후반기가 아니라 멋진 퇴직과 은퇴 후의 삶을 선택하고 싶었다. 한때는 어려서, 몰라서, 두려워서 하지 못했던 선택을 이제는 후회 없는 멋지고 도전적인 내 선택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코이카를 선택했다.

그래서 난 WFK (World Friends KOREA) 코이카 봉사단원이 되어 한국어를 가르치는 명목으로 태국으로 향했다.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어렸을 때 소망이었던 선생님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카투사가 되어서도 이루지 못한 유창한 외국어 구사의 꿈을 이룰 기회를 잡고 싶었다. 그리고 기본 2년, 최장 3년으로 약속된 외국살이를 할 기회도 얻게 되었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나라의 도움을 받아 (코이카 단원은 월급은 없다) 외국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봉사를 하면서 하게 됐으니, 금상첨화는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뚜벅뚜벅 다가오는 퇴직과 은퇴 후의 삶을 무기력하게 기다리지 않고 새 길을 떠났다. 원래 꿈인 선생님 되기와 외국어 하나 유창하게 할 수 있기 그리고 외국에서 살아보기를 이루기 위해 새 삶을 선택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삶에 떠밀려 이루지 못한 것들을 더 늦기 전에 이루기 위해 떠났다.  퇴직 후 경제적인 문제나 아들의 취업, 아내와의 일시적 이별같은 문제는 일단 시간의 흐름에 맡겨뒀다. 문제를 잠시 뒤로 미뤄두는 것도 또 하나의 문제 해결책이니까...    

            <낯선 열대 과일은 외국살이의 설렘도 주지만, 언제나 떠나온 고국과 가족을 생각나게 한다>  


  낯선 태국의 북동부 우돈타니라는 도시에서, 우돈타니 농업기술대학에서 한국어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삶엔 과연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리고 노력과 의지만으론 피할 수 없었던 삶의 역풍을 맞고 돌아온 삶엔 또 어떤 생각과 이야기가 있을까? 이래저래 쫌 살다 보니 그래도 이젠 뭘 하든 쫌 더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들을 펼쳐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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