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쫌 살아보니 쫌 더 잘할 것 같습니다.' 1장
* 2020년 3월 18일 수요일 오후
– 코이카 방콕 사무실에서 긴급 일시귀국 유선 통보 받음
* 2020년 3월 19일 목요일
- 일시 귀국 통보 : 학교, 코워커, 콘도, 태국어 과외 선생님 등에게
- 귀국 준비 : 짐 싸고 풀기(8번), 환전.
* 2020년 3월 20일 금요일
- 16:15 우돈타니 공항 출발
- 17:10 방콕 수완나품 공항 도착
- 공항 근처 호텔 숙박 (외출 금지-방콕에서 진짜 방콕)
* 2020년 3월 21일 토요일
- 09:40 태국 방콕 수완나품 공항 출발
- 17:00 대한민국 인천국제공항 도착
- 20:00 집 도착
군사작전 같은 긴박감 속에 갑작스럽게 태국을 떠나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불안에 떨게 하는 바람에 좀 불안한 마음이 있긴 했다. 하지만 전격 군사 작전처럼 그렇게 갑자기 태국을 떠나 올 줄은 몰랐다.
3월 18일 수요일.
오후에 방콕 사무실 조 코디네이터로부터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때문에 긴급히 '일시적'으로 귀국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처음에는 귀국과 태국 잔류를 선택할 수 있었다. 당장 귀국할까 아니면 남아서 추이를 좀 더 지켜볼까? 아내와 인터넷 전화로 상의해보니 무조건 들어오란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아내 말을, 골프 칠 때는 캐디 말을 따르는 게 상책이라는 세간의 말이 떠올랐고, 그동안 아내 말을 안 들어서 고생했던 일도 생각났다. 그래도 갑작스럽고 아쉽고 불안한 마음에 근처에 사는 동기 단원과 얘기를 나눴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네요. 그런데 지금 귀국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아무도 모르죠. 그건 코로나가 언제 끝나느냐에 달렸는데, 제 생각엔 꽤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그럼 선생님은 이번에 일시 귀국하기로 정하셨나요?”
“집사람은 당장 들어오라고 하는데, 한국도 상황이 꽤 심각한 것 같아요. ”
“그러니까 전 그게 더 걱정인데요. 사실 한국이 여기보다 더 위험하잖아요!”
“그래도 전 돌아가기로 했어요. 이럴 땐 가족과 같이 있어야죠.”
일시귀국이 영구귀국이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다, (코이카 규정상 어떤 이유로든 일시귀국 후 3달 안에 임지로 복귀하지 못하면 계약이 만료된다) 한국의 코로나 상황이 더 열악할수록 더 빨리 가족이 있는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도 컸었다. 아쉬움과 불안함과 당황스러움으로 전화 통화는 꽤 길었었다.
사실 그 당시(2020년 3월)에 한국에선 확진자가 하루에도 수십 명(당시엔 엄청나게 많은 숫자)씩 생겼지만, 태국은 코로나 누적 확진자가 백 명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당장 한국으로 일시 귀국하기를 꺼리는 동기 단원이 꽤 많았었다. 하지만 귀국한 날부터 태국에서도 하루에만 백 명이 넘는 확진자가 생겼다. 그래서 잔류를 결정했던 단원들도 1차 귀국 단원이 떠난 3일 후에 전원 귀국해야만 했었다. 태국도 곧 방콕에 이어 나라 전체에 봉쇄령을 내렸으니 그때 코이카에서 단호하고 신속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3월 19일 목요일
종일 귀국 짐을 싸느라 허둥지둥 보냈다. 혼자 사는 삶에 익숙해져서 냉장고는 다양한 부식 재료와 반찬들로 꽉 차 있었다. 옷, 신발, 교재, 모기장 등등 이런저런 짐이 많았다. 혹시라도 다시 돌아오면 쓸 것과 한국으로 가져갈 것, 당장 나눠주고 갈 것으로 나눠서 짐을 쌌다. 아마 짐을 대여섯 번은 더 싸고 풀었던 것 같다. 황망한 마음에 안절부절못하고 밤을 지새웠다.
그 와중에도 새벽에 아끼고 아끼던 코이카 명절선물을 뒤져 한국 라면을 두 개나 끓여 먹었다. 코이카에선 설날과 추석 명절에 고추장, 된장, 깻잎, 장조림, 라면, 컵죽, 식혜, 고춧가루, 초코파이 등등이 들어있는 명절선물 상자를 보내준다. 단원들은 그 상자를 보물상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국에선 구할 수 없거나, 사기엔 너무 비싼 것들이다. 그 아까운 보물들을 다 코워커(현지 업무 파트너, 뒤에 자세한 설명 있음)에게 주고 왔다.
<이 아까운 보물들을 다 주고 왔다.-코이카 추석 명절선물>
3월 20일 금요일
드디어 우돈타니를 떠나 일단 방콕으로 모이는 날. 오후 4시 25분 비행기로 떠나는 데도 새벽 4시부터 또 짐을 싸고 풀었다.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짐을 쌌다가 이번에 가면 다시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또 짐을 풀고 또다시 싸고 풀고….
오후에 이제는 친구처럼 지내는 코워커 차를 타고 우돈타니 공항으로 갔다. 코워커 쌍옵은 우돈타니 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도 나를 맞으러 와준 사람이었다. 그와는 생각과 달리 너무 빨리 헤어지게 됐다. 내가 쓰던 거의 모든 물건을 그에게 맡겼다. 아니, 다 주었다.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없는 말을 나누며 ‘나의 친구이자 매니저, 관광 가이드, 태국어 선생님인 코워커 쌍옵’과 긴 포옹을 하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약 1시간 정도 태국 하늘을 날아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내렸다. 사무실에서 준비한 버스를 타고 공항 근처 호텔로 갔다. 일시귀국하는 태국 단원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간단한 미팅 후 감염을 염려해 단원 모두에게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다. 당연히 식사는 각자 방에서 코디네이터들이 준비해 준 도시락으로 해결해야 했다. 단원들에게 언제나 우리 코디네이터들은 자상하고 든든하고 믿음직한 원군이었는데, 긴급상황에선 더 큰 힘이 되었다. 코로나 긴급상황에도 침착하게 태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단원들을 방콕으로 모으고 재우고 한국으로 안전하게 보내줬다. 사무소 현지 직원들과 우리 코디네이터들의 노고가 너무도 고마웠다.
3월 21일 토요일.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서 9시 40분 비행기를 탔다. 평소와 달리 너무나 한산한 수완나품 공항.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 때문에 거의 모든 비행편이 취소됐단다. 그나마 우리 국적기만 하루에 2번 운항하는 덕분에 우리 단원들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일시귀국을 결정하고도 비행편이 없어서 대기 중인 다른 나라 단원들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감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나라에 있던 단원들도 나중에 모두 안전하게 귀국했다고 한다.)
익숙한 공기의 인천공항에 도착해 평소와 다른 분위기 속에 검역을 받고, 다시 코이카 직원의 주의사항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3월임에도 인천의 밤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코이카 봉사단원으로 떠날 때의 큰 그림을 아직 다 그리지 못했는데, 내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이 돌아와야 하는 현실이 야속했다. 집으로 가는 길의 영종대교 밤바다는 유난히 어두웠다.
일시귀국은 염려대로 영구귀국이 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위력은 더 커져만 갔다. 갑작스럽게 귀국한 지 1년쯤 지나서는 하루 평균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한국은 5~6백여 명, 태국은 무려 2천 명대에 이르렀다. 코워커 쌍옵과 많은 우돈타니 농업기술대학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무사함을 빌었다.
그들과 함께한 소중한 그 날들을 되짚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