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쫌 살아보니 쫌 더 잘할 것 같습니다' 1장. 2
20대에 방송사에 들어가 라디오 PD로 살아온 지도 30년이 넘어가던 때였다. 직장에서 자리가 높아질수록 점점 프로그램 제작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규모가 작은 방송국이다 보니 점점 제작이나 제작 관리보단 경영 관련 업무가 더 많아졌다. 좋게 말해서 경영이고 쉽게 말해선 돈을 벌어오는 일이 주 업무가 되어갔다. 여건이 열악해도 재미있고 멋진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긍지와 프로듀서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왔기 때문에 남 앞에서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 돈을 벌어오는 일을 무엇보다 더 힘들어했었던 것 같다. 어느 직장이나 자리가 올라갈수록 주요 업무는 돈벌이로 수렴되기는 하지만 방송사는 그 변화가 좀 더 심한 것 같다. PD가 PD가 아니고 아나운서가 아나운서가 아니게 된다.
주어진 업무에 대한 회의감과 함께 무기력증도 찾아왔다. 작가와 머리를 맞대며 아이템을 찾고, 거기에 맞는 출연자를 섭외하느라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는 일은 남의 일이 되었다. 폼나는 스튜디오에서 큐싸인을 날리며 신나는 음악을 틀어대는 일도 후배들의 일이 되었다. 대신 협찬 캠페인을 부탁하기 위해 10여 년 만에 동문 선후배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공공기관 홍보부 연락처를 뒤적거리는 일은 언제나 열정적이던 나를 매사가 귀찮고 심드렁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던 중 TV에 있는 또래 동료가 명예퇴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명예퇴직? 팔팔한 나이에 직장을 그만두는 일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던 일이었다. 명예퇴직 조건은 최소 10년 이상 근무에 56살부터였다. 나에게 딱 맞는 조건! 더 자세히 알아보니 다른 회사에 비해 조건도 좋은 편이었다. 그날 이후로 갈등은 업무 내용이 아니라 재직이나 퇴직이냐로 바뀌었다.
매일 매일 협찬 실적 올리기에 매진하기보단 조기 퇴직의 이유를 찾았다. ‘직장 생활 30년 했으면 할 만큼 한 거야. 아무래도 명예퇴직 조건이 좋을 때 나가는 게 낫겠지? 오랜 로망을 이루려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시도하는 편이 좋아~. 더 다녀봤자 임원 되기는 글렀으니 이 꼴 저 꼴 더 사나운 꼴 보기 전에 그만둬야지.’ 등등…. 매일 매일 회사를 정년까지 다닐 이유도 찾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명퇴 바람이 가슴을 가득 채워버려서 아무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마음은 이미 ‘퇴직의 사탑’처럼 기울고 있었다. 다만 걱정은 퇴사 이후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놓지 않았다는 것! 또 하나는 집사람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집사람 설득 작전에 돌입했다.
“여보 인생 안식년이라고 생각해 줘. 30년 일했으면 할 만큼 한 거야! 이젠 좀 쉴 때도 됐잖아! 회사에서 쫓겨나는 게 아니라 명예로운 퇴직을 선택하는 거야. 그냥 그만두는 게 아니라, 제2의 삶을 더 잘 준비하려고 하는 거야! 이번에 조건도 좋다구!”
집사람은 다 이해하지만, 대학 졸업반인 아들이 취업할 때까지만 퇴직을 늦춰보라고 했다.
“아 취업이야 지 능력껏 하는 거지 내가 회사 다닌다고 뭐 도움이 되나?”
그때 집사람은 꽤 답답했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해도 내가 말을 듣지 않았으니…. 그만큼 내 삶도 답답하긴 했었다.
가끔 막연하게나마 퇴직 후엔 귀촌과 코이카 봉사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결국 코이카 봉사 생각이 5년 빨리 이루어졌다. 코이카 단원은 내 오랜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단원 임기를 마치면 그 경험을 발판삼아 새로운 일을 하면 재무적인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대부분 그렇듯이 퇴직이나 은퇴 이후를 준비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시간만 보내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은퇴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는 나마저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정년보다 5년을 빨리 퇴직하게 됐으니 준비가 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코이카에 지원할 만한 아무 자격도 없었다.
코이카 봉사단 한국어교육 분야는 대부분 한국어 교원 2급이나 3급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지원한다고 한다. 그런데 난 간신히 양성과정만 마치고 지원을 했으니 회사에 명예퇴직을 통보하고도 코이카 합격 결정이 날 때까지 정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서류 통과 후, 신입사원처럼 긴장하며 면접도 잘 치러냈다. 많은 사람이 떨어진다는 코이카 건강검진도 무사히 통과했다. 우여곡절 끝에 코이카 봉사단에 최종 합격했다. 일반적으로 코이카는 건강한 체력과 어떤 난관도 이겨낼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을 찾는다고 한다. 그래서 코이카에서 ‘양성과정 수료’라는 제일 낮은 자격에도 불구하고 합격의 영광을 주신 것 같다. 건강한 체력은 평소에 꾸준히 건강관리를 한 덕분… 이 아니라 부모님의 은혜 같다. 강한 의지는 그만큼 절박했었다는 것 같고….
최종적으로 코이카 봉사단이 되어 떠나려면 무엇보다 가족 동의서가 꼭 필요하다. 집사람은 누구보다 나를 잘 알기에 마지못해 서류에 사인을 해줬다.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님과 연로하신 장인, 장모님을 두고 떠나는 내 마음은 무거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치열한 취업난을 뚫기 위해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아들에게도 미안했다. 이 모든 짐을 떠넘기다시피 하며 떠나는 나를 집사람은 얼마나 원망했을까!
5주간의 영월 국내 교육을 마치고 드디어 태국으로 떠나는 날. 배웅 나온 집사람을 꼭 안아주지 못하고 떠난 게 무척 아쉬웠다. 가족 걱정과 아내에 대한 미안함은 임기 내내 나를 괴롭게 했다. 퇴로를 남겨 두지 않은 이른 퇴직은 임기 내내 후회와 결단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좀 더 다닐 걸 그랬나? 아냐 잘했어, 잘한 결정이야!’ 감정의 냉탕과 온탕, 후회와 결단 사이를 왔다 갔다 한만큼 금연도 자주 했었다. (태국에서 담배를 한 열여덟 번 정도 끊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