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쫌 살아보니 쫌 더 잘할 것 같습니다.' 2장. 1
코이카 단원은 누구나 임지(2년을 봉사할 곳)에 가기 전에 현지어 교육을 받는다. 봉사를 제대로 하려면 아무래도 기본적인 현지어를 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태국에서 명문으로 손꼽힌다는 탐마삿 대학교에서 약 2달간 태국어 교육을 받았다. 지나고 보니 가장 마음 편하게 지냈던 시간이기도 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빡빡한 공부 일정에 지치기도 했지만, 임지에서 겪었던 마음고생에 비하면 탐마삿 대학교에서의 생활은 구름 위의 산책이었다.
각 단원이 각자 일할 기관(학교-태국 단원들은 모두 학교로 배치된다)을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날은 바로 일주일의 OJT 기간이다. 현지어 교육을 한 달 정도 받은 후에 OJT를 가는데, 본격적인 현지 봉사 생활을 하기 전에 여러 가지 준비를 하러 가는 것이다. OJT 기간에는 기관 관계자 인사와 면담, 은행 계좌 개설, 수업 계획 협의 등을 한다. 그중 OJT 기간의 가장 중요한 일은 단연 살 집(방) 계약! 코이카 단원의 거처는 기본적으로는 기관에서 제공하는 관사다. 만약 관사 이용이 여의치 않다면 따로 거처를 알아봐야 한다. 먼저 근무한 선임 단원이 있다면 집 구하는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만, 선임 단원이 이미 떠나고 없는 단원이나 아예 나처럼 단원이 처음으로 가는 초임지의 단원이 외국에서 집을 계약하는 일은 참 막막한 문제다. 한 달간 배운 현지어 실력은 방 계약을 할 정도로 유창하지 않다. 그 때문에 오로지 코워커(부임 기관의 코이카 단원 업무 파트너 이자 도우미, 통역, 가이드, 때론 구세주...)의 도움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외국의 어느 동네 몇 집을 보고 나서 꼴랑 OJT 기간 1주일 안에 2년을 살 집을 계약한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전 세계 모든 코이카 단원들이 이런 식으로 살 집을 계약해왔다는 게 참 신통방통했다.
태국의 한여름 5월, 탐마삿 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IEAS)의 한 강의실. 온종일 꼬부랑글씨에 정신이 흐려지고, 도저히 입에 붙지 않는 성조(태국어는 5성 문자)에 불쾌지수가 태국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때 떠나는 OJT는 설렘과 해방감이 깃든 여행이었다 처음에는…. 방콕 수완나품 공항 검색대에서 안전상 이유로 치약, 로션, 클렌징, 헤어스프레이를 압수당할 때부터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뻔히 아는데도 왜 그것들을 수화물 가방에 넣지 않고 기내에 가지고 타려고 했을까? 약 1시간을 날아 우돈타니 공항에 도착했다. 다른 두 동료 단원은 마중 나온 기관 사람들을 만나 먼저 공항을 떠났다.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서 약속 시간보다 3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2차 불길한 기운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불길한 기운이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차로 30분 정도를 달려 도착한 학교에서였다. 학장(학교보다 다른 곳에 더 많이 계시는 분) 대신 3명의 부학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 우리 봉지커피보다 더 달고 진한 커피와 다과를 주며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통역은 영어 담당 선생님이라는 코워커 쌍옵이 해주었다. 경황없는 와중애도 절대 잊혀지지 않는 질문들만 적어본다.
(1부학장) “반갑습니다. 우리가 개강한 지 2주가 됐는데, 내일부터 수업할 수 있나요 캅?”
(어리둥절) “······. 저는 오늘 OJT를 왔고요. 일주일 있다가 다시 돌아갑니다. 수업은 3~4주쯤 후에 다시 와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부학장) “여기선 어떤 과목을 가르칠 계획인가요 카?”
(어리두리둥절) “ ······. 저는 한국어교육 단원이고요.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칠 계획입니다.”
(3부학장) “여기에 얼마 동안 있을 건가요 카?”
(어리둥둥두리둥절) “······. 기본 2년입니다만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변동’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를 분명하게 말했다.
이것이 학교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다는 부학장 3명이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아무리 코이카 단원을 처음 받는 학교라지만 그들은 코이카와 단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모르는 것은 차츰 알려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점점 현실로 나타나는 불길한 기운을 애써, 눈물 겹도록 애써 외면하려 노력했다.
일주일의 OJT 기간 숙소는 학교 사정에 따라 홈스테이, 관사, 외부 숙소(주로 호텔)로 나뉜다. 난 코워커 집에서 홈스테이하는 것으로 알고 떠났다. 코이카 측에서 그 비용으로 상당한 돈(5천 밧)을 미리 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짐을 푼 곳은 코워커 집이 아니라 관사였다. 말이 관사지 학생들이 쓰던 기숙사 중의 빈방을 하나 내준 것이었다. 잠깐이지만 태국 현지인의 집에서 태국 음식을 먹으며 태국 문화를 느껴보려던 기대는 너무나 허망하게 깨지고 말았다. 누추한 관사가 문제가 아니라 아무 설명 없이 약속을 어긴 것에 기분이 매우 나빴다. 코워커나 학교 쪽에서는 끝까지 홈스테이를 관사로 바꾼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당연히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홈스테이 비용도 돌려주지 않았다.
관사라는 곳은 방 2개가 한 건물로 된 1층 슬레이트 지붕 집. 방에 들어가니 침대가 3개나 있는 큰 방이었다. 코워커는 베스트룸이라고 연신 되지도 않는 말을 해댔다. 침대 3개에 냉장고 하나, TV, 세면실이 전부였다. 책상이나 옷장도 없고 취사도구나 시설도 없어서 장기 주거는 곤란한 곳이었다. 밤이 되자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산책은 언감생심! 못 알아듣는 태국 TV를 틀어놓고 어둠과 암담한 앞날을 애써 물리치고 있었다.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다 벽을 강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나무창 틈으로 보니 말 두 마리가 싸우면서 내가 있는 방 벽을 뒷발로 차는 소리였다. 환영의 인사치곤 사실 좀 무서웠다.
다음 날 아침에는 관사 여기저기가 더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바닥은 언제 청소했는지 내 맨발은 구두 밑창처럼 까매져 있었다. 형광등엔 거미줄이 처져 있고, 냉장고와 세면대에는 때가 덕지덕지 껴 있었다. 자기네 학생들을 가르치러 오는 외국 선생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어떤 단원도 대접받고 호의호식하고 싶어서 코이카 봉사단에 지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환경이 열악할수록 오히려 더 큰 봉사의 열정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코이카와 코이카 단원에 대한 이들의 무관심과 무지, 홀대는 나름 많은 것을 버리고 온 나의 열정을 식혀버리기에 충분했다. 코워커가 베스트룸이라고 말한 그 방에는 옷장도 책상도 에어컨도 없었다. 무엇보다 없는 것은 사람에 대한 배려와 예의였다. 당황, 분노, 회한과 같은 감정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모래가 깔린 듯한 침대에 누워 이 방에서 2년을 살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탐마삿 대학교로 돌아와 OJT 보고회를 할 때 학교 현황과 수업 계획 보고 대신 ‘귀곡산장 방문기’를 발표했다. 귀곡산장은 90년대 초 개그맨 이홍렬과 임하룡이 나왔던 코미디 프로그램. 실제로는 귀신인 노부부가 사는 으스스한 산장에 매회 마다 미녀 조난객이 찾아오고, 노부부가 조난객을 놀라게 하는 공포 개그로 기억된다. 조난을 당한 사람이 어쩔수 없이 찾아간 듯한 적막하고 괴기스러운 관사는 놀랍고 낯선 ‘귀곡산장 방문’ 같은 경험이었다. 봉사 기간 내내 2년 동안 귀곡산장 같은 곳에서 살 수는 없었다.
덕분에 다음 날 그리 맘에 들지는 않지만,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방을 계약했다. 코이카 규정에 원래 관사가 제공되면 관사에 사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그래서 OJT 기간 중 방문한 코이카 코디네이터(코이카 단원 관리자)에게 ‘홈스테이 같은 관사’를 직접 보게 했다. 코디네이터도 이해가 되는지 바로 외부 숙소를 알아보자고 했다. 덕분에 숙소 문제는 빨리 해결됐다. 그러나 코이카와 단원, 한국어 수업에 대한 학교의 무관심과 무배려는 꽤 오래 갔다. 그들의 무관심과 무배려는 '언제나 세상 일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뼈가 저리고 시리도록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진리도 깨닫게 해주었다.
<동네에서 제일 새 집(공사중)을 구했다. 2층 두 번째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