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쫌 살아보니 쫌 더 잘할 것 같습니다.' 2장-4.
코이카에 지원할 때 가장 마음 졸이는 것은 당연히 합격 여부지만, 합격하고 난 후에는 어느 나라로 배치되는지가 제일 궁금하다. 가고 싶은 나라를 3지망까지 적어내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희망 사항일 뿐 실제론 희망하지 않은 나라에 배정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희망 국가를 적을 때 실은 남미를 적고 싶었다. 하지만 남미는 어느 나라로 배정되든 가는 데만도 30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곳이었다. 연로하신 어머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나마 빨리 돌아올 수 있는 곳은 동남아뿐 이었다. 또 코이카 단원으로 떠나는 남편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아내를 생각해서라도 너무 먼 나라로 갈 수는 없었다.
1지망으로 적어 낸 베트남이 아니라 최종 배정된 나라는 2지망 국가로 적어 낸 태국! 태국은 비교적 경제 여건이 좋은 나라라서 원래는 코이카 단원이 파견될 수 없는 나라지만 태국의 요청으로 특별히 한국어교육단원만 파견된다고 한다. 그래서 특이하게도 코이카 태국 단원은 전원 한국어 교육단원 뿐이다. 쌀을 많이 수출하고, 대학생들도 교복을 입는 나라라는 것 말고는 태국은 아는 것도 인연도 없는 나라였다. 그냥 운명적으로 선택된 나라랄까?
선생님이 되는 오랜 꿈을 이뤄 준 학교는 우돈타니에 있는 ‘우돈타니 농업기술대학’이었는데, 특징은 수업에 학생이 안 온다는 거다. 비가 온다고 안 오고, 연휴가 있다고 안 온다. 너무 덥다고 안 오고, 특별활동(끼짜깜)이 있다고 안 오고, 앞의 수업시간이 길어져서 안 오고, 머리가 아파서(학생들이 가장 많이 대는 핑계)도 안 온다. 심지어 아무런 연락도 없이 학생이 한 명도 안 나오는 날도 비일비재했다. 태국 학교가 워낙 견학이나 자체 행사, 왕이나 왕가 관련 행사나 공휴일이 많다. 거기다가 농대는 특성상 실습이 많아서 그런지 어림잡아 정규 수업일 수의 3분의 1이 휴강이었다. 또 한국어 수업은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선택한 과목이 아니라 특별활동 같은 수업이라서, 특별한 관심이나 열의가 없는 학생들이 태반이다. 여기에다 한국어 수업 시간이 대부분 점심시간이나 저녁 먹을 시간에 배정되어 있어서, 학생들이 밥을 굶어가며 한국어 배우기를 기대하기는 태국 평균 날씨가 영하 20도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기껏 열심히 수업하다 보면 들리는 소리.
‘선생님 배고파요 크랍. 선생님 피곤해요 카. 선상님(실제로 이렇게 부르는 학생이 있다. 도대체 누가 알려줬는지 원!) 돼지 사료 주러 갈 시간이에요 카.’
한 번도 2시간 수업 시간을 다 채워 본 적이 없다. 정말 봉사와 내 존재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나날이었다.
그래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학생들이 좋아하는 갓세븐과 블랙핑크의 동영상을 보여주고 시작하곤 했다. 처음엔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BTS 동영상을 보여줬는데 아이들이 BTS를 몰라서 몹시 당황했었다. 그나마 멤버에 태국인이 있어서 안다는 갓세븐과 블랙핑크의 동영상을 틀어대며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꽤 큰 도시에 있는 동기 단원 학교에선 BTS 커버댄스 경연대회도 열린다는데…. 태국 도시 학생과 시골 학생의 문화 차이를 실감한 경험이었다.
학생들이 수업에 나오게 하려고 김밥 만들기를 하고 한글로 카드 쓰기도 했다. 학생들에게 관심이 없는 한국어를 강요하기보단 인기 있는 K POP 동영상을 보여주고, 한국 연예인을 보여주는 게 더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또 ‘한글 단어를 듣고 쓰는 빙고 게임’과 ‘낱말 만들기 주사위 게임’도 하면서 선물 대방출 시간도 가졌다. 코이카 지원 활동비는 교재 구입비보단 아이들 선물과 게임 상품 비용으로 거의 다 나갔다. 우선 학생들이 한국과 한국문화에 관심을 두도록 하는 게 급선무라 생각하고 갖은 노력을 다 해봤다. 코로나 때문에 수업을 2학기밖에 못하고 오는 바람에 계획했던 많은 이벤트를 못 하고 돌아왔다. 한복 입기, 부채 만들기, 태극기 만들기, 캘리그라피 한글 쓰기 그리고 떡볶이, 불고기, 김치 만들기도 못 하고 왔다. 매우 아쉬웠다.
2학기 수업이 끝나갈 무렵, 한글 카드 만들기 수업을 했다. 학생 주변의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한국과 한글 그리고 한국문화를 알리려는 뜻도 있었다. 부모나 선생님, 친구들에게 생일 축하 말이나 감사 인사말을 한글로 써서 카드를 만드는 수업이었다. 일주일 전에 우돈타니 시내에서 제일 큰 문구점에서 다양한 카드와 색색의 붓펜을 사놨었다. 코이카에서는 이런 교재 구입비도 지원해준다.
그런데 한글 카드 만들기 수업을 해보니 알게 된 놀라운 일 2가지!
하나는 수업에 몇 번 나오지도 않은 아이들이 너무나도 한글을 잘 쓴다는 것! 내가 워낙 잘 가르친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한글이 배우기 쉬운 우수한 글자이기 때문일까? 무엇이 맞든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또 하나는 그동안 애써 감춰온 진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타나왓’이라는 학생이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절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카드에 ‘선생님은 매우 잘 생겼습니다.’라고 쓴 카드를 만들어 나에게 준 것이다. (역시 진실은 나라를 불문하고 통하는구나!)
애써 감춰온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엄정한 진실 확인 절차를 거쳤다.
(떠듬떠듬 태국말) “카드 고맙다. 한글 잘 쓰는구나!”
(청산유수 태국말) “고맙습니다. 선생님 캅.”
(떠듬떠듬 태국말) “그런데 뭐라고 쓴 건지 아니?”
(청산유수 태국말) “네 알아요. 선생님은 매우 잘 생겼어요 캅!”
(떠듬떠듬 태국말) “정말? 진짜로?”
(청산유수 태국말) “네 선생님은 정말 미남이에요 캅!”
(떠듬떠듬 태국말) “너 정말로 거짓말을 못 하는 착한 아이로구나. 잘 썼다 잘 썼어!”
내가 외국인임을 배려하지 않고 하는 아이들의 태국말은 정말 알아듣기 힘들다. 그래도 대강의 뜻은 다 알아들었다. (이심전심, 심심상인, 염화미소 등등...) 태어나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처음이지만, 진실로 버무러진 카드를 보며 많은 선생님이 이런 맛에 힘든 교육자의 길을 가시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큰소리로 ‘가나다라’를 따라 읽던 맑은 눈빛의 학생들을 잊을 수가 없다. 한글 단어 빙고 게임을 하면서 열심히 받아쓰기하던, 아니 열심히 받아 베끼던 귀여운 학생들이 눈에 선하다. 생전 처음 모내기를 하느라 미끄러운 논에서 자꾸만 넘어지려는 나를 보며 깔깔대던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무엇보다 ‘선생님은 매우 잘 생겼습니다.’라고 쓸 정도로 맑고 정확한 눈을 가진 학생들이 그립다. 2학기 밖에 못 가르치고 중간에 돌아오게 한 코로나가 정말 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