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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Sep 13. 2021

뷰티풀 컬러풀 라이프

멀리서도 환하게 빛나는 노오란 티셔츠를 입은 그녀는 봄에 만개한 개나리꽃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회색과 검정을 번갈아가며 고수하던 그녀의 삶이 색깔을 입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봄에는 자두색 꽃무늬 롱드레스를 입고 왔고. 단색을 입을 때도 내가 선물한 한글 무늬가 들어간 화사한 분홍 스카프를 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단지 몸에 걸치는 컬러가 바뀌었을 뿐인데, 그녀의 얼굴은 한결 생기가 돌고 행복해 보였다.


"노랑 티를 입었네. 너무 잘 어울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네 덕분이야"

"내 덕분이라고?"

"응. 너는 매일 컬러풀한 옷을 입잖아. 또 내가 이런 옷을 입으면 칭찬해 주고."

"그럼. 색깔은 삶이니까."


색깔은 삶이니까. 그녀에 대해 결코 다 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여태껏 내가 본 그녀의 인생은 흑백과 컬러. 이 두 시기로 극명하게 나뉘었다. 십 년 전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를 받고 진한 담배 냄새가 밴 파리의 한 사무실에서 그녀를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우리가 통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그녀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친절했지만, 긴 불행의 터널을 통과했으며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이의 어둠이 서려있었다.


한 번도 자신의 개인사를 일터에서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그녀를 보고 있으면 늘 길고 깜깜한 터널이 보였다. 그녀 주변을 감도는 불행과 슬픔의 기운 때문이었는지. 혹은 나 역시도 슬픔의 터널을 통과했던 경험이 있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자신의 슬픔을 내가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한다는 것을 알 리가 없던 그녀는 나를 편애에 가깝게 좋아했고. 나는 그런 그녀가 행복하기를 속으로 바랐다. 그래서 내가 그 직장을 그만둔 후에도 우리는 친구로 남았다.


얼마 전에 기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가족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녀가 말했다. "아빠는 내가 스무 살 때 자살을 했어. 엄마는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일 년 후에 돌아가셨고." 알지 못하면서 아는 것들이 있다. 그녀가 나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은 건 처음이었지만. 마치 이전부터 알았던 것 같았다.


“늘 검정과 회색만 입었는데.. 몇십 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떠나보내지 못해서 그랬던 거 같아..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그녀는 아버지의 자살과 뒤따른 어머니의 죽음 후 화재로 여동생 또한 잃었다. 아직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이 한참 남았을 시기에 이별의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하나둘씩 그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삶에 이토록 큰 불행이 파도처럼 연거푸 덮칠 수 있을까. 그동안 그녀를 보며 느꼈던 슬픔이 온전히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검정, 회색만 고집하던 그녀는 삶보다는 떠나보내지 못한 죽음 가까이 서있었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부터 삶을 색칠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시도하고. 보이지 않기 위해 늘 자신을 감추었는데 사람들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놀랍도록 당당하고 행복하게. 이 모든 변화는 그녀의 삶을 물들였다. 빨강. 노랑. 초록. 분홍. 컬러풀한 옷들은 내면의 색채가 자연스레 바깥으로 번지는 과정이었다. 이 컬러들은 그녀에게 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매번 감탄하며 말한다. 뷰티플 컬러풀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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