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당일 전 굽는 냄새가 부엌에 진동했다. 동생이 깻잎에 양념한 고기 반죽을 예쁘게 싸주면 거기에 부침가루를 옅게 발라 계란을 입혀 굽는 건 내 몫이었다. 전이 익기 시작하며 명절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한국 슈퍼에서 사 온 여러 반찬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을 계획이었지만 역시 명절에는 전이었다. “깻잎전 한 번 해볼까?” 얼마 전에 한 지인의 정원에서 꽤 많이 따온 깻잎 뭉치를 보고 동생은 제안했다.
“깻잎전? 어렵지 않아?”
“내가 한 번 해볼게.”
그렇게 동생은 요리사가, 나는 동생의 조수가 돼서 깻잎전과 호박전, 동그랑 땡을 굽기 시작했다. 전을 구으니 명절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고, 그제야 추석을 실감할 수 있었다. 타국에서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면서도 명절에 전을 구워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기껏해야 설날에 떡국을 먹는 정도였다. 한국은 빨간 날이지만 여기서는 아무 날도 아니었기에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국 회사에서 일할 때는 명절마다 떡을 받아 그나마 기분이라도 낼 수 있었지만, 프랑스 회사에서 일한 후부터는 그마저 없었다.
마침 독일에 사는 동생이 생일 겸 놀러 온 게 추석 기간이어서 명절 상을 차려보기로 했다. 부엌에서 한
시간 넘게 전을 굽다가 동생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우리 둘이 함께 전을 굽고 있으니 신기하지 않아?" " 그러게." 익숙한 명절 냄새였지만 우리는 한 번도 이 냄새를 집에서 맡아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할머니 집에 가면 맡을 수 있던 전 굽는 냄새도 가족이 차츰 흩어지고 와해되며 더 이상 나지 않았다.
그래서 명절은 내게 더없이 쓸쓸한 순간이었다. 티브이에서는 귀성길 차량 정체 뉴스를 계속 내보냈고, 친구들은 입시나 취업을 물어보며 은근슬쩍 자신의 자식들과 비교하는 친척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했지만. 차량 정체도 명절 스트레스도 없는 내게는 모두 딴 나라 이야기였다. 명절의 북적거림도 전 굽는 냄새도 사라지며 집에 홀로 남겨지는 시간이 늘어났고, 스무 살이 넘어서는 주로 해외 생활을 하게 되면서 명절은 더더욱 내 삶에서 사라졌다.
명절이 사라진 삶이란 명절 증후군이나 명절 스트레스가 없는 삶이기도 했지만, 전 굽는 냄새 같은 인에 박힌 무언가와도 멀어진 삶이기도 했다. 요즘이야 명절에 귀성길 대신 여행을 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 때만 해도 전혀 볼 수 없던 풍경이었다. 선택하라면 그중 뭘 선택했을지 모르겠지만, 선택하기도 전에 명절은 어느 순간 내 삶에서 사라졌다. 어쩌면 그때부터 오랜 이방인 생활이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명절에 할머니 집에 가면 늘 깻잎전을 해줬잖아.“ 우리는 어린 시절 할머니 집에서 명절 때 먹었던 음식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깻잎을 그땐 좋아하지 않았는데 깻잎전은 달랐다. 다진 고기가 들어간 깻잎전을 실컷 먹고도 집에 갈 때 싸주신 전들로 남은 명절을 풍족하게 보냈다. 그때는 명절이면 그렇게 먹는 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잊혀져갔다. 독일에 10년째 살고 있는 동생을 만나 함께 전을 지지며 그때를 떠올릴 줄이야.
“뭐가 이렇게 맛있어.”
요리사지만 식탐이 많지 않은 남편은 듬뿍이 쌓인 깻잎전을 바닥이 날 때까지 먹었다. 설마 이걸 오늘
저녁에 다 먹을까 싶었던 건 기우였던 모양이다. 프랑스 시댁 식구들이 있는 채팅창에 사진을 보내자 당장 난리가 났다. “이게 뭐야? 너무 맛있어 보인다. 방금 밥 먹었는데 침 흘리고 있어.“ 깻잎전이 뭔지 설명하기 위해 프랑스에 없는 깻잎에 대해 알려주자 시어머니는 다 같이 키워보자며 씨앗을 사서 나눠주겠다고 했다. 깻잎전의 인기는 국경을 초월했다.
우리가 보낸 사진에는 깻잎전 말고도 활짝 웃고 있는 동생과 나 그리고 남편이 있었다. 독일에 산 지 10년째 되는 동생, 프랑스에 산 시간이 어느새 한국에서 보낸 시간과 비례하기 시작한 나. 3살에 한국에서 프랑스로 입양돼 어느덧 중년의 아저씨가 돼 가고 있는 남편. 자의로 혹은 타의로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우리에게 깻잎전은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그 시절을 행복하게 기억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깻잎전 같은 즐거운 추억은 고소한 향수를 불러왔다.
초반에 유학생으로 외국 생활을 할 때는 명절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한국에서 추석이라고 해야 추석인 줄 알고, 설날이라고 해야 설날인 줄 알았다. 가난한 유학생으로 당장 먹고사는 일도 막막했을 때 들려오는 명절 소식에는 그 어떤 감흥도 생기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제대로 보낸 적 없던 명절이었다. 명절 날짜를 먼저 체크하기 시작한 지는 겨우 몇 년 전부터이다. 설날이라고 떡국을 해서 남편과 함께 먹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내 삶에서 명절이 다시 의미가 있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의미는 어릴 때와는 또 달랐다. 아무도 한국의 명절을 알지 못하고 명절날이라고 특별한 것 없는 곳에서 조촐하게나마 명절을 지내는 것은 관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의식에 더 가까웠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뿌리는 언제나 한국인으로 남아있고자 하는 의식. 3살 때 입양된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명절을 축하하는 의식. 이번에는 독일에 있는 동생까지 합류해서 더욱 소중한 추억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번 추석은 더욱 의미 있고 행복했다.
식사를 마친 후 집 근처 센느 강을 다 함께 산책하기로 했다. 동그랗고 밝은 보름달이 밤하늘에 걸려있었다. “달 봐봐. 완전 환한 보름달이다. 근대 여기도 추석에 보름달이 뜨네? 아 맞다. 달은 하나지.“ 동생은 내 말에 황당하다는 듯 웃으면서도 보름달에 눈을 떼지 못했다. 어릴 때 할머니 집에서 추석 밤이면 보던 보름달을 파리 밤하늘에서 보게 될 줄이야. 마음도 덩달아 넉넉해졌다. “내일은 다 같이 송편 빚자.“ 보름달을 보며 나누던 말도 떠올랐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오래전 어느 명절의 추억이었다. 우리의 행복도 잘 빚은 송편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