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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솔 Jun 13. 2020

[오피니언] 그리운 무대, 그리운 관람석.

공연장에서의 감동을 기다리며.


 최근 피아니스트 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y Sokolov)의 신보가 발매됐다.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도시 투린에서의 공연을 전체 녹화한 자료로, 연주자 무대 입장, 관객의 박수갈채와 앙코르 연주까지 공연장 분위기를 함께 담았다.

© 2020 Grigory Sokolov, under exclusive license to Deutsche Grammophon GmbH, Berlin

 지난 3월 초에 예정되어있던 소콜로프의 베를린 공연이 날짜를 며칠 앞두고 6월로 미뤄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21년 5월로 다시 한번 미뤄졌다. 그의 신보를 감상하는 내도록 그의 공연을 더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소콜로프의 공연은 이미 여러 차례 찾아가 보았다. 쇼팽 프렐류드(24 Preludes Op. 28), 브람스 후기 피아노 소품(6 Klavierstücke Op. 118, 4 Klavierstücke Op. 119), 베토벤 소나타와 바가텔도 감명 깊게 들었지만, 베를린에서 그가 연주한 슈베르트 즉흥곡(4 Impromptus D 935)은 공연 후 몇 개월에 걸쳐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마치 후유증처럼 앓아야 했다. 어둡게 설정된 무대조명과 마치 공연의 3부를 연상시킬 만큼 오래 이어지는 앙코르 연주는 그의 으뜸 상징이 되었다. 유럽을 벗어나 연주하지 않기 때문에 음향 좋기로 소문난 공연장 혹은 관광지로 유명하고 규모가 큰 도시에서 열리는 공연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청중의 비율이 높고, 그 때문에 표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가격이 싸지도 않다. 좋은 음질로 녹음된 많은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어 감사하지만, 음반 감상 중의 감동은 공연장에서 직접 실연을 경험하는 것을 결국 따라가지 못함을 잘 알기에 공연을 자주 찾아다녔는데,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의 여파로 직접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물론 다른 연주자의 공연마저 포기하고 단념해야 한다니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Ivo Pogorelich) 공연이 떠오른다. 독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그는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과 프로코피예프의 여섯 번째 피아노 소나타(Piano Sonata Op. 82) 1부를 장식했고, 2부에서 그라나도스의 12개의 스페인 무곡(12 Danzas españolas)  발췌한  가지 악장과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Gaspard de la nuit) 연주했다. 공연 1중간 휴식이 지나고  느려진 걸음으로 무대를 가로질러 피아노 앞에 앉은 포고렐리치가 연주한 그라나도스의 작품이 10년도 넘게 지난 오늘까지 생생히 기억난다. 훌륭한 피아니즘을 바탕으로  프로코피예프 소나타와 수많은 음색과 막대한 긴장감이 함께한 라벨의 작품도 대단했지만, 마치 공연장을 천천히 어둡게 하고 공기를 점점 무겁고 뜨거워지게 하는 마법 같았던 그라나도스의 스페인 무곡은 굉장했다. 만약  공연을 녹음자료로 접했다면 내가 회상하는 감동은 분명 전해지지 않았을 거다


 2018년 12월의 시작을 몇 시간 앞둔 저녁에 베를린 필하모니의 캄머무직잘(Kammermusiksaal)에서는 피아니스트 미츠코 우치다(Mitsuko Uchida)의 연주로 세 개의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가 울려 퍼졌다. 이날 나의 좌석은 무대 위, 연주자로부터 왼쪽으로 대략 두 발자국 떨어진 자리였다.

 착석하고 보니 연주자 위치와 너무 가까워 혹시 방해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사이 공연의 주인공인 피아니스트가 무대 위로 나타났다. 그는 건반을 마주 보고 앉자마자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공연의  순서인 슈베르트 가단조 소나타(Piano Sonata D 537)   마디도 지나지 않아 연주를 중단, 양손을 허공에 번쩍 들고 “Ich fange noch mal an!” 다시 시작하겠다고 외쳤고, 관객석의 혼란과 당황이 섞여  어느 공연에서도   없는 집중된 분위기 속에 연주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공연을 이어갔다.  순간 공연장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가끔  공연을 회상하며 혹시 관객을 모두 집중시키려는 우치다의 계획된 행위는 아니었을까,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공연이  기억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이유는 아마도 슈베르트가 남긴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Piano Sonata D 960)를 연주하는 우치다, 그리고 공연 초반부보기 드문 에피소드 때문이 아닐까.


 한 연주자의 특정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음반과 영상 자료로는 느낄 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이 공연장에 존재한다. 연주자로서, 그리고 청중으로서 실황의 마술 같은 매력이 그립기만 하다. 그래도 음악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니 기다림이 괴롭지만은 않다.



June 2020 /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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