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ssily Kandinsky - Meeting Point [1928]
어머니의 집 앞 공터에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새끼 고양이를 발견했다.
어미는 오기 않았고, 공터의 파리떼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눈은 뜨지 않았고 결막염을 앓아 눈곱이 말라 붙어 있었다.
다만 살려고 울부짖는 목청과 움켜쥐려는 네 발에 돋아난 가시 같은 발톱들.
어쩌랴, 살려야지 했다.
늦은 밤에 동물용품점에 가서 새끼 고양이용 분유를 사서 강제로 먹였다.
씻겼다. 눈곱을 떼고 눈을 뜨게 했다. 두 눈에 흰 망막이 어렸다.
겨우 겨우 사물을 분간하는 것 같았다.
밤새 먹이고 설사하고 안절부절못했다. 다행히 새벽녘에 잠을 잤다.
깊고 깊은 잠을 잤다. 돋아난 발톱을 숨겨졌다. 그리고 울부짖던 목청도 가라앉았고, 아기 고양이가 되었다.
병원에 갔지만 갓난 고양이라 건강을 체크할 몸이 되지 않았다.
우선을 먹이고 재웠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분유를 타고 먹였다. 결혼도 육아도 해본 적 없는 네가
고양이 육아를 했다.
그리고 한 달 사이 너는 기생충 감염과 허피스, 그리고 헬리코박터균 수치가 54가 넘는 형편없는 건강 상태를 검진받았고, 주사를 맞히고 약을 먹인다. 하루에 세 번, 안약도 하루 다섯 차례, 그러나 결국 한쪽은 부어올랐고, 안구가 썩어 들어가서 적출수술을 했다. 수술 후 일주일 가량은 미치도록 스트레스가 올랐다.
어린 녀석은 눈이 가렵고 손톱으로 긁지 못하게 깔때기를 씌운 탓에 어린 몸이 이겨내질 못했다.
그것을 지켜보는 나 또한 어린 녀석의 마음과 꼭 같았다 할까.
지난 토용일에 깔때기를 벗겼다. 그리고 외눈박이 생을 시작했다. 꿰맨 실밥이 그래도 보인다.
한쪽의 동공도 아직 완전히 돋아 나질 않았다. 안약은 계속 넣어야 한다.
외눈박이로 뛰고 애교를 부리고 먹고 변을 보고 잠자리를 찾아내고 내 무릎을 찾아온다.
그러나 한쪽 눈을 잃은 이후 소리에 너무 민감해서 자극 소리에도 극도로 예민하다.
음악을 크게 틀기가 미안타. 바깥에 소음에도 민감하다. 소리에 둔감해질 수는 없을 듯하다.
마당에는 각가지 수국이 만발했고, 농익은 블루베리를 따먹으로 직박구리 새들이 찾아온다.
담담히 바라보고 있다. 한 동안 이 생활의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연초에 고양이 한 마리 키워볼까. 했던 마음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우주는 언제나 내가 바라는 바를 이루어준다.
해마다 찾아오던 직박구리 부부가 올해는 왜 오지 않나? 내심으로 찾아와서 검게 익은 블루베리를 따먹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랬더니 며칠 사이 부쩍 자주 한 쌍이 나타나 돌아가면서 열매를 먹더니
이윽고 어린 새끼들도 찾아와 먹어준다. 나는 먹을 만큼 먹었다. 충분히. 그래서 더 이상 때지 않는다.
검게 농익은 블루베리 네 그루 나무에 달려 있다. 그냥 둔다. 내 것 아니다, 세상 것이다.
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가는 것을 보내준다.
정원에서 배우는 것은 그런 것이다. 황무지가 될 수 있고 정원이 될 수 있고, 풀들이 무성한 잡초지가 될 수 있듯
마음도 그렇다, 보는 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세상은 변한다.
어린 새끼 고양이가 얼마나 살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사는 대로 살게 하는 것이다
마당의 정원 가꾸는 일처럼 동물을 살리는 일도 내가 해주는 게 아니라 그들 목숨이 살려는 의지대로 사는 것이다.
식물들도 가만히 보면 맹렬히 살려고 노력하는 게 보인다. 잘 가꾸어주면 한숭어리 꽃에 숱한 기쁨의 미소가 있다.
향기로 벌을 부고 나비를 부르면서 바람에 춤추는 것 보는 것부터 향기가 없이 색채의 향연으로 온 정원을 희미한 미소의 공기로 진동 치는 꽃에까지 모두가 본유의 생체리듬을 찾아 살고 있는 것이다.
숨소기 속에 골골 거리는 애끓는 소리를 듣는다. 밤의 정밀한 별들이 끓여내는 빛 같다.
책상 위에 돌
손바닥으로 만지면서 새삼 돌의 질감을 느낀다.
까칠하고 가을볕 같은 기분 좋은 질감이다.
선방의 스님처럼 돌은 책상 위에서 복식호흡을 하고 있다.
나도 함께 복식호흡을 해본다.
먼 곳에 한 물결도 또 오고 있다.
그 물결은 어떤 물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