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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가 아닌가

제미나이 3.0에게 시를 묻다

by 일뤼미나시옹

사과가 아닌가

-김정용



사과가 아닌가 살균제를 치고 살충제를 치고 농약을 치고 나면 태어나는, 사과가 아닌가

머리가 잘린 나무에 매달렸다는 사과가 아닌가


과일을 먹지 않는 가족들 틈새에 나는 사과가 아닌가

춤을 못 다 춘 사과가 냉장고에서 늙고 있지 않는가


썩은 부위를 가지고 있는 사과는 연인이지 않는가

껍질은 벗겼다는 것은 가부좌를 풀었다는 것이 아닌가

사과를 어루만진다는 건 너를 벗기겠다는 것, 아닌가


사과나무가 사과를 꼭 쥐고 너를 기다리지 않는가

사과나무가 사과를 내려놓은 건 너의 미완성 때문이지 않는가


사과를 쥐고 사과나무에 닿아 사과를 걸어주면

사과나무의 졸업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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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썩음과 구원의 변증법, 혹은 '사과'라는 이름의 타자(他者)


— 인공의 숲에서 잉태된 슬픈 에로스와 역(逆)의 순환에 대하여

이 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과'라는 기표(Signifier)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사과는 자연의 결실이나 풍요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것은 폭력적인 현대성이 낳은 사생아이자, 미완의 욕망이 투사된 연인이며, 끝내 나무로 되돌아가야 할 제의적 제물입니다.


1. 독성(Toxicity)으로 잉태된 현대적 주체 (1연)


"살균제를 치고 살충제를 치고 농약을 치고 나면 태어나는 사과가 아닌가"

시적 화자는 사과의 탄생을 축복이 아닌 '생존'으로 묘사합니다. 살균제와 살충제라는 죽음의 세례를 견뎌야만 태어나는 사과는, 고도의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억지로 생산되는 우리네 삶과 닮아 있습니다.

머리가 잘린 나무: 접목(grafting)을 통해 생산성만을 강요받은 기형적인 모체를 암시합니다.


냉장고의 춤: '춤을 못 다 춘 사과'가 냉장고에서 늙어간다는 표현은 탁월합니다. 생명력이 거세된 채, 썩지도 못한 state로 유예된 죽음을 맞이하는 현대인의 고독한 초상입니다. 가족들 틈에서 먹히지 않는다는 것은 소외와 불통의 메타포로 읽힙니다.

2. 부패의 에로티시즘과 탈신비화 (2연)


"썩은 부위를 가지고 있는 사과는 연인이지 않는가"

이 대목에서 시는 존재론적 성찰에서 연애론(Relational theory)으로 급선회합니다. 완벽하고 매끄러운 사과가 아니라, '썩은 부위'가 있는 사과를 '연인'으로 호명합니다. 이는 사랑의 본질이 상대의 결핍과 상처(썩음)를 껴안는 행위임을 통찰합니다.

가부좌를 풀었다: 껍질을 깎는 행위를 수행자의 엄숙한 자세(가부좌)를 해제하는 것으로 연결했습니다. 이는 성스러움의 훼손이 아니라, 무장 해제를 통한 육체적 교감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사과와 '너'의 혼종: 사과를 만지는 행위가 곧 '너'를 벗기는 행위로 치환되면서, 사과는 단순한 사물이 아닌 화자의 욕망이 투영된 관능적 객체가 됩니다.

3. 미완성을 위한 기다림과 역설적 졸업 (3~4연)


"사과를 쥐고 사과나무에 닿아 사과를 걸어주면 사과나무의 졸업이지 않는가"

이 시의 백미는 마지막 결구에 있습니다. 보통의 섭리는 나무가 사과를 떨구는 것(낙과)이지만, 화자는 떨어진 사과를 다시 나무에 매달아 주려 합니다.

내려놓음의 이유: 사과나무가 사과를 포기한(내려놓은) 이유를 '너의 미완성'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완벽하지 않기에 세상으로 내쳐진 존재들입니다.


졸업의 의미: 화자는 그 미완의 사과를 다시 나무에 걸어줍니다. 이것은 **회귀(Return)**이자 **복원(Restoration)**입니다. 열매를 억지로 뺏기는 것이 나무의 운명이었다면, 열매를 다시 돌려받음으로써 나무는 비로소 생산의 의무에서 해방됩니다. 그것을 시인은 '졸업'이라 명명했습니다.


[총평] 질문의 형식을 빌린 비가(悲歌)

이 시를 관통하는 **"~가 아닌가"**라는 반복적인 의문형 어미는 독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 현실을 확인 사살하는 주술적인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시인은 묻고 있습니다. 농약으로 얼룩진 탄생, 냉장고 속의 고독, 썩어가는 살의 에로스, 그리고 마침내 근원(나무)으로 되돌려주는 제의까지. 이 모든 과정이 바로 우리네 삶의 알레고리가 아니냐고 말입니다.

이 시는 "먹는 사과"에서 "만지는 사과"로, 다시 "걸어주는 사과"로 나아가며, 소비의 대상을 구원의 대상으로 승화시킨 수작(秀作)입니다. 사과 하나를 통해 자본, 고독, 사랑, 그리고 죽음의 형식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내게 시를 펼쳐달라 하셨습니까? 이제 당신의 손에 들린 것은 마트 진열대의 매끈한 사과가 아닐 것입니다. 농약을 견디고, 냉장고에서 늙어가며,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상처 입은 '당신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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