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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늘 Sep 02. 2021

세계일주의 시작

세계일주를 가기로 마음 먹었더니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주일 168시간을 월급이란 이름으로 저당 잡혀 사는 직장인에게 세계 일주가 가능한 걸까. 세계 일주는커녕 휴가도 내기 어려운데. 브레이크도 못 밟고 반복되어가는 매일매일의 무료함에 잠식되어갔고 반복되는 삶에 절여졌다.



 우연히 세상의 모든 공항에 모든 비행기가 오르고 내리는 정보와 모습을 구현해 놓은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업무에 지칠 때면 가고 싶은 곳을 정해 한국발 비행기가 그곳으로 날아 도착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떤 날은 저 비행기에 타고 있을 사람들의 설레는 표정이 그려졌고 내 모습에 대입해 보기도 했다. 트렁크를 끌며 웃고 있는 나의 모습은 오래 되 흐릿한 영화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흘러갔다.



어렸을 적에 80일간의 세계 일주라는 책을 본 적이 있다. 비행기가 없던 1800년대에, 80일 안에 지구 한 바퀴를 돌 수 있는지 내기를 하는 내용의 소설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비행기가 있지만, 세계 일주는 여전히 모험 가득하고, 설레는 단어였다.


설렘. 내 인생에 그게 없었다. 그즈음 내가 쓴 일기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내일에 대한 기대와 꿈이 있다는 게 인간이 가진 특권 인데 그저 매일매일을 숨이 붙어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 뿐인 건 동물과 다름이 없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다. 꿈도 없다.

꿈을 꾸고 싶다.

기대를 하고 싶다.

계획을 짜고 싶다.


지금의 어떤 생각이 몇 년 전 어린 날의 고민과 다름이 없다는 건 지금까지 발전이 없었다는 것..

내 고민은 고등학생 그때의 고민과 다르지가 않다.

5년 후에 똑같은 고민을 또 하지 않으려면 지금 뭘 해야 할까




나는 꿈이 없는 게 괴로웠다. 그리는 미래가 없었다. 그저 취업이라는 두꺼운 문을 열고자 애썼는데, 애쓰고 나니 그건 내가 만든 내 꿈이 아니라 그런가. 그다음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을 했다. 뭘 해야지 5년 뒤에 또 똑같은 고민으로 괴로워하지 않을지.



솔직히 답이 없었다.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대로는 아닌 거 같았다. 무언가 인생에 방향을 바꿔주고 싶었다. 내가 내 인생이란 배의 선장이라면, 방향키를 바꿀 때라고 생각이 됐다.

남이 선택한 인생에 경로가 아닌 내가 선택한 경로가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어렸을 적의 꿈을 이루는 것을 그 첫 번째 경로로 선택했다.



하던 일 때려 치고 모은 돈 긁어모아 세계 일주 가요! 라고 하면 꽤 답 없이 용감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매일 매일 악몽을 꿨다. 인생에 아주 새로운 선택을 한다는 건, 그것이 노는 거라고 할지라도 꽤 괴로운 일이었다. 온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너 살던 대로 살지 왜 그래. 항상성을 중요시하는 뇌가 아주 몸부림을 쳤다. 새로운 일은 하지 말라고.



나와의 오랜 싸움 끝에 가방을 꾸려 페루로 떠났다. 2017년 3월. 20대의 마지막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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