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라즈
8시간 버스타기 챌린지 (feat.차멀미 30년차)
나는 한국에서 30분 이상은 버스를 타 본적이 없다. 멀미 때문이다. 차로도 1시간 이상 거리를 가는일은 거의 없다. 그런 내가 여행에서 첫 번째로 하는 일은 8시간 짜리 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지금도 생각한다. 대체 어떻게 했지?
일단 남미의 버스는 한국의 버스와 수준이 다르다. 우리나라의 고급 고속 버스 보다도 훨씬 좋다. 물론 제일 비싼 버스를 골랐을 때 얘기지만 (그 제일 비싼 버스도 한국의 제일 싼 일반 고속 버스보다 보통 싸다) 버스는 거의 180도로 젖혀지는 것은 물론, 넓기도 넓고, 푹신하고, 심지어 차 안에 승무원도 있다. 담요도 주고 밥도 나온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화장실이 있다!
나는 화장실을 좀 자주 가는 편이고 화장실이 없으면 마음이 불안하다. 그래서 한국 버스가 타기 싫은 이유가 가장 큰데 버스가 있으니 거의 걱정의 90%를 해결한 셈이다. 멀미는 멀미약 이라도 있지만 없는 화장실은 만들수도, 안데스 산맥 중간에 홀로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런데 8시간을 타야 하는 이 버스는 좌석도 넓고, 화장실도 있고, 자리를 잡은 2층 맨 앞자리는 경관도 끝내 줬다. 걱정했던 것 이상으로 자리도 편해서 그런지 멀미도 거의 안 했고, 잠도 잘 와서 잠도 푹 잤다.
그래서 첫 8시간 버스타기는 어땟냐 하면 꽤나 좋았다. 정말 꽤나 좋았다. 그리고 뭐가 제일 좋았냐 물으면 바로 버스에서 제공되는 밥이였다. 아니 무슨 버스에서 밥을 주는것도 놀라운데, 어떻게 이렇게 따끈한가? 왜 이렇게 맛있는가?? 중국집에서 방금 볶아서 고슬고슬하게 내 온 볶음밥 같았다. 버스 밑창에 주방이 있나 의심될 정도였다. 페루는 의외의 미식국가이고, 정말 많은 음식을 먹엇지만 가장 기억나는 음식이 뭐예요 라고 물으면 난 이 버스에서 먹은 볶음밥이요 라고 대답한다. 아직도 그 불향과 따끈따끈하고 고슬고슬한 밥맛이 입안에서 느껴지는거 같다.
와라즈에 간 이유
와라즈는 페루 수도 리마에서 북쪽으로 버스로 8시간 정도 가면 있는 곳으로, 해발 3,090m에 위치한 안데스의 고산도시이다. 마추픽추 같은 큰 유적지가 있거나 유명한 무언가가 있는 도시는 아니다. 굉장히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 도시이다. 첫 세계일주, 첫 국가의 첫 도시. 꽤나 의미 있을 법 한 곳으로 왜 와라즈를 골랐을까?
나는 그냥 한국인들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이 도시에서, 그냥 조금 쉬고 싶었던 것 같다. 번잡한 도시도, 꼭 해야할 액티비티나 꼭 가봐야 할 유적지가 있지 않은 그냥 조용한 시골이 필요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그래 그게 필요했던거 같다. 그러기에 와라즈는 완벽한 곳이였다.
그래도 8시간은 무리 아니야?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남미에선 어딜 갈래도 이정도 시간은 기본이다.
세계로 나와 보니 우리나라가 얼마나 지리적으로 작은 나라인지 새삼 더 깨달았다. 한번은 여행중 마주친 독일인 친구랑 얘기 하는데 ‘알다시피 우리나라가 워낙 작잖아’ 이러는거다. 그래서 ‘..? 우리나라는 너네나라보다 더 작아’ 이랬더니 ‘아니 그럴리 없어. 우리나라 정말 작아’ 이러는거다 그래서 ‘어.. 알겠는데 우리나라가 더 작아’이래서 같이 앉아서 지도를 찾아보고는 그 친구가 정말 놀랬던 기억이 있다.
와라즈 숙소
첫 남미여행. 첫 혼자 여행. 첫 여행지 와라즈. 한국에서 미국까지 10시간 대기시간 5시간 또 페루까지 10시간. 그리고 버스 대기와 버스를 타고 8시간 정말 하루를 꼬박 교통수단에 앉아 왔다. 그런 상황에서 시작부터 도미토리를 가고싶진 않았다. 게다가 와라즈는 고산지대라 적응 하는데도 시간이 좀 필요 하다고 하니, 조금 혼자서 편히 쉬는게 좋을거 같단 판단을 했다.
그래서 찾은 호스텔이 올라자 호스텔이였고 게다가 첫날부터 피곤하게 도착해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헤메는 수고를 하고싶지 않았는데 무려 버스터미널로 픽업을 나오는 서비스를 했다. 그래서 너무도 편하게 숙소로 갈 수 있었다. 호스텔은 조용했다. 4층 정도로 이뤄진 건물 이였는데 특이하게 가운데가 뻥 뚫려있고 네모난 테두리에 방들이 있었다. 이국적인 느낌 물씬이었다.
내가 선택한 방은 침대 두 개 짜리 트윈룸이었는데 침대 하나에는 어설프게 싼 나의 배낭을 다시 싸고자 모든 짐을 다 꺼내 펼쳐 놓고 나머지 하나의 침대에서 잠을 잤다.
너무 오랜시간 이동하고 도착해서 도착한 직후는 뭔가 왔다는 감상보다는 그냥 기절해서 자기 바빴다.
진짜 내가 남미에 왔구나, 여행을 왔구나 느낀 순간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처음 조식 먹은날의 풍경을 잊지 못한다. 조식을 옥상테라스로 준비해 주는데, 사방으로 펼쳐진 고산의 능선. 그림같이 멈춰있는 구름. 평화 로운 자연의 내음까지. 내 정신부터 발끝까지 흐르는 내 혈관의 세포 하나까지도 평화롭게 만들어줬다. 이제 내가 진짜 남미에 왔구나. 혼자 떠나 왔구나. 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와라즈에서의 일상
와라즈에서의 3박4일은 한마디로, 먹고 자고 동네 산책하고! 사실 이 이후에도 많은 도시들에서 거의 이렇게 지냈다. 내가 좋아하는건 조용한 숙소. 그리고 좁은 골목 골목 돌아다니면서 동네 익숙해지기. 동네 맛집 가기. 그리고 동네 시장 구경 하기. 여행을 한다는 건, 그리고 혼자 여행은 한다는 건 여러모로 자기에 대해서 잘 알아가는 과정이다.
한번은 동네 뒷산에 올라갔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코에 코카잎을 꽂고 사색을 즐기고 계셨다. 나는 인사를 하고 근처에 앉았다. 앉고 보니 그자리가 명당이더라. 앞으로 건너편 산의 전경이 쫙 펼쳐져서 멋있었다.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데 당연히 못알아듣지.. 나는 라틴어를 못합니다. 라고 말을 하고 ( 그 말은 알았다) 앉아 있었는데 못알아 듣던지 말던지 말을 시키시길래 나도 그냥 한국말로 대답했다.
우리 사이에 무슨 대화 다운 대화가 있었겠냐만 그냥 뒷산에서 모르는 할아버지랑 코에다가 코카잎 꽂고 한사람은 라틴어로 한사람은 한국말로 수다를 떨었다는게 너무 웃겼다.
동네 시장을갔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였는데, 어느 집 앞에 큰 나무에 리본과 여러가지 과자, 음료 등을 주렁주렁 매달아놓고 사람들이 그 앞에서 노래 틀고 춤추고 맥주 마시고 있는 것이였다.
나무에 주렁 주렁 달려있는것도 신기하고 술과 음악이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지.. 하는 마음에 슬금 슬금 인사를 하면서 다가가니 반갑게 인사를 하며 같이 와서 한잔하자고 바로 맥주를 따줬다. 같이 맥주도 마시고 춤도 추면서 놀면서 지금 왜 파티를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이제 곧 나무를 자를 거라서 나무를 위한 축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나무를 이제 베야되서, 나무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였다. 나무 한그루도 소중히 생각하는, 자연을 존중하는 페루 사람들의 마음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