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자주 가는 까페에서 예쁜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보이고 캐럴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사실 요즘은 이런 저런 주식들에 물려있다보니 '시간이 참 빠르다'는 식의 말은 더이상 입 밖에 나오지 않지만(반등은 언제인가...지금이니?!), 그래도 캐럴이 들려오니 마음이 포근해지고, 벌써 크리스마스 시즌인가, 벌써 연말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2021년은 상심도 크고 서운한 일도 많았고 여러 가지로 참 쉽지 않았던 한해였지만(다만, ASML 주식이 고공행진하면서 금융치료에 의존했던 시절...이때 다 팔았어야 했다.) 2022년은 좋은 일들이 많았던 한해였던 것 같다. 저 위 대문짝처럼 걸어둔 사진 속 내 모습이 보여주는 것처럼, 포르토(Porto)와 암스테르담에서 보냈던 한 달의 시간은 정말 '내 인생을 이대로 여기서 끝내도 좋다' 싶을 만큼 더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돌아와서도 한국과 일본에서 소중한 분들과 교류를 이어가며 정말 감사한 시간들을 보냈고... 이렇게 좋았던 시간들을 하나 둘 씩 곱씹어보면, 주식 시장이 출렁이듯, 인생도 어려운 날들도 있으면 좋은 날들이 있는 것이리라 생각이 든다. 그래. 멀리보면 결국 평균으로 (내 실력대로) 돌아갈 것이다. Regression to the meanㅋ (그러니까, 증시는 지금이 바닥일까? 나스닥, 지금이니?)
아무튼. 한동안 한국어 블로그는 잊고 링크드인이나 개인적인 연구노트 또는 학위 논문에만 집중하고 지냈었는데 다시 연말이 되니 지난 시간들을 정리하면 좋겠다 싶어서 서랍장을 열어보게 되었다. 언제 또 이 글을 꺼내볼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인생의 하락장 혹은 상승장을 보내고 있을 미래의 나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미 말했듯, 돌이켜보면 2022년은 시작부터 꽤 좋았다. Kluwer에서 2021년 한국 경쟁법 동향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아 글을 쓰게 된 것도 비록 원고료는 없었지만 매우 값진 경험이었고, 또 내가 좋아하는 ASCOLA의 Asian Chapter에서 발표 요청을 받게 된 것도 사례비는 없었지만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관련 글과 슬라이드는 1월에 발표되었고 각각 여기,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올해 글은 여기에.
사실 그 전인 2021년까지만 해도 나는 여러가지 일들로 자신감을 많이 잃은 상황이었다. 여러 연구 프로젝트에서 떨어지고, 서두르다가 학위 논문 심사를 말아먹고 등등... 근데 주식이 올랐네.. 개인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그때는 정말 내 삶이 이렇게 무의미하게 끝나는 건가 싶었다. 만약 혼자였거나 경제적으로 다소간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크게 넘어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역시 힘든 때일수록 빛나는 인연들이 있다. 오히려 마냥 행복했으면 몰랐을 텐데 어려운 때라서 그랬는지 잊지 않고 찾아주는 분들이 한 분 한 분 정말로 소중하고 감사했다. 사실 이분들이 내게 준 것이라고는 인정과 따뜻한 말 몇 마디 그리고 발표 기회 정도였을 뿐이지만, 그러한 작은 따스함들 덕분에 몸과 마음을 좀먹던 부정적인 흐름을 끊어내고 (부담스러운 한국에서 잠시 벗어나) 새로운,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새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하다.
특히 감사드리고 싶은 분은 Masako Wakui 교수님. 생각해보면,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렇게 친분이 두터운 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고 소중한 기회를 주려고 노력해주신 게 생각나 신기하고 감사하다. 이후로도 기회 있을 때마다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이 글을 빌려 다시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남기고 싶다.
아무튼 2022년은 Wakui 교수님과 Cheng 교수님의 배려로 ASCOLA와 함께 상쾌하게 시작하였고, 덕분에 이후에도 좀 더 안정된 마음가짐으로 한 해를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었다. 만약 위와 같은 터닝포인트들 없었다면 어지롭고 괴로운 마음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되었을지 나도 모르겠다.
물론 늘 그렇듯 고작 몇 번의 이벤트에 일상이 확 달라졌던 것은 아니다. 슬럼프라고 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2022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그저 연구도 잘 안풀리고 그저 답답한 마음에 보낸 날들의 연속이었다. 답답한 캠퍼스를 떠나, 분위기 좋은 까페도 가보고 공유 오피스에도 있어보고 했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눈을 뜨고 일어나 나가 책과 논문을 읽고 작업 중인 파일을 열고 닫고 집에 돌아와 자고 다시 일어나고. 마치 하루 종일 글을 쓰면 겨우 한 줄 한 줄 써지다가 하루 이틀에 걸쳐서야 겨우 한 장 완성되는 것처럼 (이벤트는 잠깐이고) 내 일상도 그저 지루한 날들의 반복이었다.
참 따분한 시간들이었는데, 사실 또 돌이켜보면 그때 '참 안풀린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내 연구에 있어서는 제일 생산성이 높고 제일 '잘 풀리고 있던' 날들이었다. 이 시기에 긴 호흡을 갖고 집중한 덕분에 생각을 많이 정리할 수 있었고 또 내가 가장 어려워했던 이론 파트를 어느정도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같은 주제(거래상 지위 남용)로 씨름하고 있어서 당시 내가 쓴 글을 많이 스스로 많이 들춰보는데, 볼 때마다 '지금 다시 쓰라면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지도교수님께서도 공감하셨던 것처럼 원래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기 글을 나중에 보면서 스스로 감탄한다고 하지만 ㅋㅋ ('내 생각을 이렇게 유려한 글로 표현해낸 이 글의 저자는 대체 누구지? 이상...윤?!') 이번엔 진짜다. 내 머리의 한계를 생각하면 다시는 같은 수준의 글을 써낼 수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ㅋ
당시 쓴 글은 당연히 현재 학위 논문을 작업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래서 좋기도 한데... 사실 그보다는 이 글을 바탕으로 올 여름 17차 ASCOLA 연례 컨퍼런스에서 발표를 하고 수많은 좋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ASCOLA는 유럽에서 공부할 때부터 발표가 없어도 되도록 참석하려고 노력하면서 관심을 쏟아왔기 때문에, 힘든 시기에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에서 인정(다른 무엇보다 큰 인정은 역시 Travel funds...)을 받고 교류할 수 있게 되니까 더욱 특별했던 것 같다.
근데 뭐가 그렇게 좋았냐고? 그냥 모든 게 다 좋았다. 오랜 만에 여행가는 기분이 나서 좋았고, 내가 씨름하던 주제가 관심 받고 토론의 대상이 된 것도 좋았고, 다른 학교 대학원생들을 만난 것도 좋았고, 날씨도 좋았고... 2022년 여름, 비록 짧았지만 포르토에서 보냈던 날들은 내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당시 발표한 내 글과 슬라이드는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꾸 ASCOLA, ASCOLA 하는데 이게 뭐냐면, 별 건 아니고 그냥 "Academic Society for Competition Law"의 약자다.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경쟁법 학자들이 원로, 신진, 대학원생 가리지 않고 모여 교류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젊은 학회다. 사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학회이기도 하고ㅋ
내친 김에 학회와 관련된 분들께 한번 더 감사 인사를 남기면, 한참 부족한 연구지만 발표할 용기를 내도록 격려해주신 Julian Nowag 교수님, Ignacio Herrera Anchustegui 교수님, 펀딩을 결정해주신 Thomas Cheng 교수님, 발표가 끝난 뒤에도 따로 찾아와 좋은 말씀을 아끼지 않아주셨던 Wolfgang Kerber 교수님, 그리고 매끄러운 사회는 물론 본인의 발표 중에도 언급해주시고 블로그에도 내 연구를 소개해주신 Rupprecht Podszun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참고로 다음 18차 연례 컨퍼런스는 아테네(Athens)에서 열린다고 한다. ASCOLA에 가면 은근히 일본 분들은 많지만 한국 분들이 없어서 (비록 멀더라도) 내년에는 한국 사람들도 좀 더 많은 분들이 참석했으면 좋겠다. 18차 컨퍼런스의 주제와 일정 등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초록 제출은 2023년 1월 27일까지! 잊지 말자!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다시 한국.
10월에는 개인정보보호위원회 ◯◯◯ 선생님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1-2시간 정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스터디 형식으로 개인정보보호위원회 분들 그리고 다른 경쟁법 교수님과 함께 모임을 가진 일이 있었다. ◯◯◯ 선생님은 내가 예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개인정보보호위원회에서 일했을 때(그리고 나중에 짤린...) 알게 되었는데 함께 있었던 시간은 아주 짧았지만 그래도 좋은 기억들이 많아 간간히(몇 년 주기로ㅋ) 연락하고 지내고 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내가 경쟁법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불러주셔서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자문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감사하고 좋은 시간이었다.
당시 회의 주제는 시장 경쟁(경쟁법)과 데이터 프라이버시(개인정보보호법)의 관계였다. 마침 한국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페이스북 결정도 있었고 독일 경쟁당국의 페이스북 사건에 대한 유럽연합 법원 AG Rantos의 의견서도 나왔었기 때문에 토론 거리도 많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비공개 간담회 형식의 작은 스터디 그룹이었어서 자세한 내용을 옮겨 적기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그때 내가 답변용으로 준비했던 파일은 혹시 관심 있는 분들이 참고하실 수 있도록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서) 아래 공유해둔다.
이상윤, '개인정보법과 경쟁법 이슈 관련 사전질의서(이상윤 임시답변 추가)' (2022. 10. 12)
연구생 신분(한국에서는 '학생' 신분)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가족 등 주변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걱정을 많이 끼치고 있지만, 조금 뻔뻔하게도 난 내 인생에 만족하면서 잘 살고 있다ㅋ 특히 다른 직장인들처럼 어느 한 곳에 몸이 매인 신세가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머리는 늘 연구에 묶여있는...) 이곳 저곳 떠돌이처럼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굉장히 만족스럽다.
얼마 전에는 일본 교토에서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정말 우연하게 성사된 자리였고 연구생 신분이 아니라면 누릴 수 없는 기회였기 때문에 정말 좋았다. 일본에서 한 일은 (위에 갈무리한 것처럼 내 링크드인에도 간단히 공유했었는데)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스터디와 발표였다. 주로 교토대학교 Masako Wakui 교수님과 대만에서 오신 Shin-Ru Cheng 박사님과 함께 스터디로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하였고 도쿄에 가서 하루 일정으로 Yoshizumi Tojoo 교수님 등과 함께 내 연구를 주제로 토론하고 그랬다.
사실 휴식 시간은 거의 없었고 말 그래도 '빡쎈' 일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하루종일 '빡세게' 공부하고 호텔 방에 돌아와서 일본 편의점 맥주를 홀로 홀짝 홀짝 마시고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일본답게 아담한 호텔방 침대에 걸터 앉아 역시 편의점 과자를 먹으면서, 많고 많은 삶의 가짓수들 중에서 이렇게 나와 궁합이 잘 맞는 삶을 살게 되어서 참 감사하고 좋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2022년은 참 좋은 한 해였다. 사실 (학위 논문에 집중해야하는) 일반적인 대학원생의 모습이라고 볼 수는 없고 또 바람직한지도 의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감사하고 만족스러웠던 한 해였다.
이미 말했지만, 너무 한량같아서 가족과 주변에는 걱정을 많이 끼치고는 있어도, 정작 난 지금의 삶에 크게 불만 없이 만족하며 잘 살고 있다ㅋ 남보다 앞서고 싶다든지 한 자리 차지하고 싶다든지 그런 욕심들은 내 역량상 (적어도 한국에서는) 채울 수 없는 욕심들임을 알기에ㅠ 더이상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고 (물론 돈과 주식은 그렇지가 않아ㅋ)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보내는 시간들보다는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좋아서 이렇게 지내는 시간들이 참 만족스럽다고, 감사하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 무엇보다 연구라는 일이 적성에 맞아서 감사하다. 남을 관찰하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들을 정리하고 다시 남들과 나누는 일은 내게는 참 매력적이다.
물론 만족한다는 것과 행복하다는 것은 전혀 별개다. 당연히 늘 행복하지는 않다ㅋ 투자하는 사람들이 오르면 '더 사둘 껄' 내리면 '미리 팔아둘 껄' 하는 것처럼, (확실한 지대(rent)를 누리는 인생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장삼이사들이 그렇듯 나도 삶에서 행복감보다는 '불행감'을 더 많이 느끼는 것 같다. 다만 이 일을 하다가 내일 비명횡사해도 내 삶에 큰 후회는 없겠다 싶은 것은 알겠고 그래서 만족하는 것뿐이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요즘 쇼펜하우어를 인용하면서 인생의 목적은 행복에 있지 않다고 하는 컨텐츠들을 많이 보는데 정말 깊이 공감한다. 나도 삶에서 행복을 찾기보다는 죽음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23년의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새해도 늘 지금처럼 자유롭게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내가 좋아하는 글귀와 함께 글을 마친다. 다들 메리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