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Regulation, 2. UTPs, 3. Harm
경쟁법(competition law)은 영어가 정말 중요한 분야다.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좁은 한국에서 벗어나 글로벌하게 소통하며 연구(또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는 장점이고, 우랄 알타이어족의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입장벽 또는 핸디캡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점이다.
내게는 단점이 컸다. 만일 내가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자랐고 영어를 잘했다면 경쟁법 연구자로서 장점을 누리며 연구를 좀 더 즐기며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불행히도 나는 '주어-목적어-서술어' 순으로 생각하며 중고 시절 영어를 성문종합영어로 공부한 한국인이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경쟁법 공부가 정말 너무 너무 너무 힘들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석사 때 매일같이 영어로 쏟아지는 자료들 가운데서 허우적 거리며 한국어로 셋팅된 내 머리가 얼마나 한스러워 했는지 모른다.
이 글은 혹시라도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분들을 위해 쓰게 된 글이다. 많은 한국 분들이 훌륭한 역량이 있음에도 해외에서 고작 영어때문에 저평가를 받고 있는데 아무래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부디 내가 공유하는 몇 가지 시행착오 사례들이 누군가에게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참고로 아래는 주로 영어로 경쟁법에 관한 말을 하거나 듣거나 글을 읽거나 써야할 때 주의해야할 부분들을 정리한 것으로 아직 생각나는 게 몇 개밖에 없어서 많이 적지는 못했다. 추후 (반응이 좋고) 생각이 나면 시리즈로 좀 더 써보도록 해야겠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정말 (특히 이제 막 경쟁법을 시작한 분들께) 가장 먼저 공유하고 싶은 팁은 경쟁법(competition law)에는 규제를 뜻하는 "regulation"이라는 표현을 가급적 쓰지 말라는 것이다.
이유는, 최대한 간단히 설명하자면, "at the risk of oversimplification," 우리가 한정된 자원 배분(allocation)을 위한 시스템으로서 '계획(planning)'이 아닌 '시장(market)'을 선택한 이상 시장실패(market failure)를 교정하기 위한 정부의 개입 수단으로서 경쟁법은 원칙이고 규제는 예외라서 그렇다. 다시 말해서 비효율적인 사업자를 새로운 효율적인 경쟁자가 대체하는 시장 원리가 살아있다면 반시장적 행위(anti-competitive conduct)를 제재하는 수단은 원칙적으로 경쟁법(competition law)이지 규제(regulation)가 아니기 때문에 경쟁법에는 규제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둘은 구별해서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규제(regulation)는 특정 행위보다는 특정 산업(예컨대 철도 산업 등)에서 시장 원리 자체가 아예 마비되었을 때 일시적으로 정부가 인위적 조정자로서 개입해서 시장 시스템이 돌아갈 때까지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예외적 수단이다. 시장 메커니즘이 살아나면 예외적인 규제는 폐기하고 다시 경쟁법에 의한 최소한의 규율로 돌아가는 것이 맞다. 그리고 그때 최소한의 규율이 바로 경쟁법이다. 이런 배경에서 영어를 쓸 때 "competition law"와 "regulation"는 구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을 혼용해서 쓰면 사람들에게 마치 DMA와 같은 하이브리드를 지칭하는 것으로 혼란을 줄 수 있다. (자세한 논의는 다음 문헌 참고)
물론 한국과 일본의 공정거래법에서는 규제라는 표현이 매우 자주 쓰이고 있으며 이것이 강학상(규제학의 관점에서) 틀렸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을 나도 안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 언론과 학계에서는 '불공정거래행위 규제'라든지 '공동행위 규제'라든지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규제'라든지 하는 표현들을 쓰는 것을 많이 본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영문으로 글을 쓸 때 "abuse of dominance regulation"처럼 "regulation"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 처음에는 나도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국제 컨퍼런스에서 나 혼자만 (그리고 일본 분들 몇몇...)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더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 부디 이 글을 읽는 한국 사람들만큼은 나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어떤 표현을 쓰는 것이 좋을까. 지금까지의 내 경험상 경쟁법 상의 의무들에는 "regulation" 대신 금지를 뜻하는 "prohibition"이나 규정이라는 표현인 "provision," "rule" 등이 자주 쓰이고 또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the prohibition of abuse of superior bargaining position" 또는 "the abuse provision" 이렇게. "Regulation"이라는 표현은 특수한 부문별 산업규제(sector-specific regulation)를 뜻하는 경우에 한정하여 쓰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DMA와 같은 혼합형은 논외다.
다음은 한국 공정거래법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표현인 "불공정거래행위"의 영어 표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맥락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사업자-사업자 거래 상황에서의 불공정한 거래 행위를 지칭하고 싶다면 "unfair trading practices" (축약해서 UTPs)라고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trading"이라고 하든지 "trade"라고 하든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지만 (좀 더 넓게 "unfair practices"라고 하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다) "transaction"은 직접적인 계약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잘 쓰지 않는다. 참고로 플랫폼과 사업자 맥락에서는 "hamrful trading practices"라는 표현도 쓰고 사업자-소비자 관계에서는 "unfair commercial practices"라는 표현으로 쓸 수도 있다. 호주에서는 "unfair business practices"라고도 한다.
솔직히 말해서 불공정거래행위의 번역에 대해서는 지금도 100% 확신은 없다. 유럽이나 미국과 달리 일본과 한국의 공정거래법상 '불공정거래행위'는 비-시장지배적 사업자의 남용행위(abuse without dominance)는 물론 수직적 합의 또는 제한(vertical restrictions)이나 맹아적 단계의 반독점행위(incipient violations)도 포함하고 부당한(unjust)* 고객유인(unfair inducement)이나 오인 유발 행위(misleading conduct)와 같이 부정경쟁(unfair competition)에 더해 소비자 이익 저해 행위(금보개발 사건)까지도 어느 정도는 포함하는 무지막지하게 넓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 참고로 공정거래법상 "부당하게"에는 '불공정하다'는 의미 외에 '경쟁을 제한한다' 또는 '경제적 효율성을 저해한다'는 뜻도 있으므로(포스코 사건) "unfair"가 아닌 "unjust" 등 다른 표현을 써주는 것이 좋다.
다만 비교 연구가 활발한 유럽의 경우 시장지배적 지위(dominance)와 관련 없이 '자신의 사업상 리스크 또는 비용을 부당하게 거래상 열위의 상대방에게 이전하는 것'을 공통 분모로 하는 행위들을 "unfair trading practices"라고 지칭하고 있고(Green Paper (2013)) 나는 이 표현이 한국, 일본의 불공정거래행위와 가장 근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unfair trading practices"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는 것뿐이다. 아직 더 좋은 표현은 찾지 못한 것 같다. 더 좋은 표현을 찾은 사람은 그걸 쓰면 될 것이다.
예컨대 유럽식이 싫다면 미국에서는 FTC법 제5조에서 "unfair methods of competition"을 규정하고 있는 것도 참고할만 하고, 호주를 비롯한 영미법계에서는 "unconsionable conduct"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참고할만 하다. 그리고 호주의 소비자법보호법 제21조 - Section 21 of the Australian Consumer Law (Schedule 2 of the Competition and Consumer Act 2010) - 가 동아시아의 불공정거래행위 중 하나인 거래상 지위 남용 금지와 상당히 유사하니 이런 부분도 참고할 수 있겠다.
어떤 표현을 선호하든 자유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해둘 점은 사업자-사업자 관계에서 "unfair commercial practices"라는 표현을 쓴다든지 사업자-소비자 관계에서 "unfair trading practices"를 쓰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발화의 맥락을 다르게 전달할 위험이 있는 표현은 피하는 게 좋다.
* 위 표는 아래 제가 발표한 슬라이드에 있는 내용입니다. 관련 내용을 이용하실 때는 부디 다음의 인용표기를 부탁드립니다: Sangyun Lee, 'Some Afterthoughts on the HARM of ASBP / AED, coming after 'Abuse of Economic Dependence / Superior Bargaining Position in Korean Competition Law: From a Comparative Perspective with Japan' (Rikkyo University, Tokyo, Nov 2, 2022)' (Seoul Workshop: Looking at Fairness and Antitrust through the Lens of ASBP, Seoul, Dec 16, 2022) https://lnkd.in/gMQvwvw2
다음은 경쟁법상 위법성(illegality)의 의미를 갖는 "harm"의 용법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경쟁법상 위법성을 말할 때 소비자나 거래상대방에게 직접 피해가 가는 착취적 행태의 경우에는 "theory"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그냥 "harm"이라고 하면 된다.
"Harm"이란 구체적으로, 경쟁법상 위법한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정당하지 않은(unmeritorious) 수단으로 경쟁 구조를 왜곡시켜서 결과적으로 소비자(consumer) 또는 고객(customer)이 정상 시장가보다 높거나 낮은 가격을 지불하도록 만들거나 더 적은 선택권을 갖도록 만들거나 시장의 공급 수준을 정상 수준보다 높거나 낮게 유지되도록 만드는 경우 등을 의미한다. 여기에 '이야기'와 비슷한 뜻의 "theory"라는 단어가 붙는 것은 경쟁 사업자들이 시장에서 (정당하지 않는 행위에 의해) 퇴출되거나 배제되거나 진입을 못하게 되는 경우 그러한 상황의 귀결로서 위와 같은 "harm"이 나타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다.즉, "theory of harm"은 시장지배적 지위의 배제적 남용(exclusionary abuse)의 위법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시장지배의 착취 남용(exploitative abuse)이나 카르텔을 통해 나타나는 직접적인 착취적 결과에는 그냥 "harm"이라고만 하면 된다. "Theory of harm"은 아니다.
나도 한참 아무 곳에나 "theory of harm"이란 말을 갖다 붙여 쓰다가 석사가 끝날 때쯤이 되어서야 Giorgio Monti 교수님으로부터 이걸 배우게 되었다. 불공정거래행위나 가격남용 같은 맥락에서는 (원칙적으로는) "theory"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다.
이게 뭐 별 거냐 싶지만 한국이나 일본의 불공정거래행위 금지 규정을 번역할 때나 한국의 시장지배적 지위의 착취적 남용 금지를 번역할 때(일본의 제3조와 제2조 제5항의 규정은 착취 남용에 적용되지 않는다) 상당한 의미가 있다. 한국은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금지나 재판매가격유지행위 금지 규정 등을 집행할 때 빼고는 대부분 "theory of harm"이 아니라 "harm" 그 자체로 위법성이 설명되기 때문이다. 경쟁제한성 불공정거래행위의 경우는 아니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지만... 법원이 거래상대방의 자유를 제약하는 걸 여전히 위법성의 요소 중 하나로 본다면 사실 "theory"를 보기엔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아무튼 그 논의는 일단 제쳐두고. 가격 남용이나 카르텔(excessive pricing or cartels) 이야기를 하면서 "theory"를 붙이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화자가 경쟁법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착취 행위가 배제 효과를 초래해야만 제재할 수 있다는 의도를 말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할 수 있으므로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만 더 부연하자면 경쟁법은 기본적으로 경쟁 사업자 배제 후의 착취(exploitation, by firstly excluding competitors)를 금지하는 법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다. 즉, 경쟁법이 우려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업자들의 합의 또는 독과점 사업자의 등장으로 시장에서 경쟁이 있었을 때보다 소비자(또는 고객)이 경제적으로 피해를 보는 경우라는 것이다. 여기엔 학계의 이견이 없다. 기본 중의 기본인데 한국에서는 가끔 이 부분을 제대로 짚어주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서 따로 강조해둔다.
물론 관점에 따라서 경쟁 당국의 개입 시점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다. 예컨대, 아래 그림[A]에서 표현한 것처럼, 시카고 학파(Chicago School)의 주장에 따르면 (카르텔처럼) 맨 오른쪽 극단의 착취가 나타난 경우에만 경쟁법이 나서는 것이 맞고, 포스트 시카고 학파(post-Chicago),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 하버드 학파의 구조주의, 또는 맹아이론(incipiency doctrine)의 입장에 따르면 좀 더 이른 시기에 경쟁법이 개입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결국 개입시기상의 차이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경쟁법은 "exploitation"을 막기 위한 법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누군가는 물어볼 것이다. '하지만 착취 남용(exploitative abuse)을 포함하는지 여부는 여전히 학계의 논쟁 대상이 아니냐'고. 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는 착취는 정확히 말하면 배제 없는 착취(exploitation without exclusion) 또는 직접적 착취(direct or pure exploitation)다. 제약회사가 특별히 역지불합의나 불합리한 특허권 연장 등으로 경쟁 사업자를 배제하는 행위를 한 것은 아닌데 환자가 의존적 상황에 있음을 기회삼아 갑자기 가격을 확 올려버리는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유럽법상 시장지배적 지위의 착취적 남용은 배제를 건너 뛴 착취 행위에 대한 개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아래 그림[B]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불공정거래행위 또는 거래상 지위 남용행위는 굳이 분류하면 (시장지배력 없이도 가능한) 착취적 행위에 해당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기회될 때 설명하도록 하겠다. 참고로 위의 그림들 역시 Sangyun Lee, 'A Theoretical Understanding of Abuse of Economic Dependence in Competition Law' (17th ASCOLA Conference, Porto, Jun 2022) https://ssrn.com/abstract=4134583 , 13면과 47면에서 발췌한 것이니 이용하실 때는 부디 인용 표기를...
아무튼 결론! "Harm"과 "theory of harm"은 의미하는 바가 다르니 구별해서 쓰자.
(to be con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