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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vinstyle Jan 31. 2024

화가 나서 밀어냈습니다

회사문화 답사기 10

영업 1팀의 매출마감 주간이 시작되었다.


매월 마지막 주는 영업팀 멤버들에게 고난의 행군 주간이었다. 이 주간에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부장님, 팀장님 얼굴이 점점 까매진다

팀장회의가 자주, 길게 전개된다

팀원들의 말수가 현저히 줄어든다

팀원들의 눈치보기가 심해진다

대리점주는 영업담당자 미팅을 피한다

영업실적리포트가 하루에 두 번씩 전달된다


당월에 주어진 매출목표를 달성한 멤버도 미달한 멤버도 예외 없이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우리 팀장님과 옆팀장님 눈치를 살폈다. 모든 영업멤버들은 월말주간에는 등 대고 자던 매트리스를 하나씩 걸머지고 출근했다.


부장님이 이사님께 호출을 받고 들어갔다 나오시면 팀장(과장)님 두 분이 부장님과 회의를 하셨다.


어느 날은 십여분, 어느 날은 삼십 분, 마감날은 한 시간을 넘기기도 하였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시는 팀장님 손에는 '월간매출진척보고서' 한 장이 들려져 있었고 거기에는 각 팀별 담당자별 대리점별 매출과 달성률이 적혀 있었다.


미달한 담당자와 대리점은 빨간색으로 적혀 있었다. 지금도 하얀 종이에 빨간색 글자를 보면 심장이 쫄깃해진다.


우리는 각자 관리하는 대리점을 순회 방문하면서 대리점 사장님들과 당월주문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한 협의와 제안, 판매전략 아이디어 회의등을 하면서 개인매출과 팀 매출달성을 위해 매진하였다.  


나는 대리점과 매출협상을 하기 위해 협상과제를 준비했다.

당월 판매촉진 인센티브 프로그램

팀 전체 대리점별 제품별 매출 추이

내가 맡은 대리점의 전월과 당월 실판매지수

대리점 영업사원별 매출실적 추이

대리점의 전월말 재고 및 현재고 수량

대리점의 여신한도와 외상매출금

광고홍보계획과 프로모션 지원내용


매출달성을 위한 판매촉진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특정모델의 주문수량을 늘려서 판매장려금을 늘리거나, 분기별 매출성장에 따른 분기 인센티브 프로그램 등급을 올리거나, 특정 제품의 실판매 촉진을 위한 판촉비용의 특별지급 같은 프로모션 프로그램들을 기획하여 대리점 사장님과 협상을 통해 매출을 끌어올리는 것이 주된 영업 포인트였다.


92년 여름 어느 마감일.

오후 2시쯤 영업팀 회의가 소집되었다.


팀장님은 팀의 매출목표에서 3억이 부족하니 각자 매출을 더할 방안을 찾고 대리점 방문 후 오후 5시에 다시 모이라고 지시하셨다. 영업멤버들은 이미 매출을 당길 만큼 당겨둔 상황이라 고개를 저으면서도 일단 각자 사무실을 나섰다.


5시 영업회의를 재개했다.

팀장님은 고참 대리님의 실적부터 하나씩 점검하기 시작했다. 대리님은 평소 차분하게 시장을 분석하고 월초엔 항상 대리점을 순회하면서 사장님들과 간담회를 하던 분이셨다. 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리점 3군데를 맡고 계셨고 대리점 사장님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쌓고 있었기에 대리님의 매출목표는 초과달성이었다. A사원은 다소 이기적인 성향으로 대리점 매출을 무난하게 달성할 수 있는 대리점들을 맡고 있었는데, 지난달에 무리하게 매출을 일으켜 재고가 많아 이번 달 매출은 더 못한다고 방어했다. B사원은 생산부서에서 영업팀으로 작년에 전배온 팀원으로 팀 내에서 작은 대리점 서너 개를 맡고 있었으며 당월 매출목표가 너무 과하다고 힘들다고 난처해했다. C사원은 내성적이고 다소 소극적 성향이었는데 본인은 매출을 할 만큼 다했다고 버텼다.


나는 내 영업목표는 달성한 상태였으며 추가하기에 곤란한 상황이라고 팀장님께 말씀드렸다.


팀장님은 대리님께 매출목표를 맞추기 위해 팀원들과 다시 의논해 보라고 지시하시고 회의실을 나가셨다. 물론 퇴근한 것이 아니라 팀장님 자리로 가신 거였다.

이미 회의를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지났기에 다들 지쳐있었다. 사실 회의가 아니라 매출짜내기가 목표였기 때문에 멤버들은 관리하는 대리점 사장님들과 전화로 추가매출을 유도하고 부탁하고 막바지 팀 매출목표 달성을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있었다.


'마른 수건도 쥐어짜면 물이 나온다'는 비장한 각오로 대리점 사장님들을 얼르고 달래가면서 조금씩 매출을 추가해 나갔다. 물론 그 매출들은 모두 다음 달에 실판매 증가로 이어지지 않으면 또다시 곤혹스러운 다음 달 월말마감을 맞이할 것이 분명했지만 오늘 당장 이번 달 매출은 맞추고 넘어가야 다만 며칠이라도 숨 쉬고 살 수 있기에 '오늘만' 생각하고 집중하였다.


1억이 부족했다.

다시 팀장님과 모인 멤버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시선은 책상 위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팀장님은 어떻게 좀 해보자며 멤버들 눈치를 살폈다. 대리님도 이미 매출을 초과해서 대리점 사장님의 허락 없이 임의매출을 1억 이상 해 둔 상태라 더 이상 여력이 없었다. 적막이 또 흐르고 한 시간이 지났다.


나는 화가 났다!

대리점마다 매출추가협의는 이미 끝났고, 더 이상 합리적인 매출방안이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매출을 달성하라고만 하는 팀장에게 화가 났다.

멤버들 저마다 매출노력은 했겠지만 더 이상 방안을 찾으려 하지 않고 눈치만 보는 멤버에게 화가 났다.  피로가 몰려왔고 어떻게든 심장 토할듯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지하고 무리한 치기를 부렸다.


"제가 00 대리점으로 1억 매출하겠습니다."

내가 총대를 메었다. 여신한도가 살아있던 작은 대리점에 임의매출을 발생시켰다. 대리점 사장님은 이미 매출을 못 받겠다고 한 상태였기에 협상은 다음날 하기로 미루어놓고 밀어내기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들 말없이 늦은 퇴근을 했다.


2부는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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