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kelvinstyle
Apr 23. 2024
판도라 TV의 명운이 흔들리고 일 년 남짓 버텨온 자금의 고갈이 다가 온 시점에 나는 자발적 퇴직을 했다.
다행히 삼보컴퓨터 시절 선배가 외국계 PC 세일즈 기업에서 일하고 있었고 시니어 레벨의 세일즈맨 구인기회가 있음을 알려주어 취업의 길이 열렸다.
IBM Lenovo였다.
중국기업인 Lenovo는 IBM의 PC사업부문을 통째로 인수하고 당분간 IBM조직 안에서 세일즈를 하던 시기였다.
한국지사장은 LG IBM CFO 출신이셨고 세일즈맨은 LG IBM 유통영업 멤버들과 삼보컴퓨터 출신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들 세일즈 분야에서 명성을 높였던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일 년 전에 설립된 Lenovo 조직에서 핵심 세일즈 채널은 기존 조직이었던 LG IBM출신들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었고 신규시장 개척을 위한 포지션만 공석이어서 나에게도 Lenovo 합류의 기회가 주어졌다.
☞높은 연봉과 더 높은 매출목표
입사서류를 제출하고 연봉협상에 들어갔다. 생존의 보루를 마련해야 하는 나의 처지에서 제시하는 연봉의 액수는 다소 낮아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협상에 임했다.
의외로 연봉은 고액이었다.
외국계 기업이 고액을 쉽게 가져가게 놓아두지 않음은 분기별 매출목표 달성에 따라 월급 수령액이 달라지는 Base salary와 Target Incentive salary 구조에 있음을 한 두 달 만에 체감하였다.
연봉이 1억이면 분기 매출목표를 달성하면 BS 40% + TIS 60% = 100% 기준으로 다음 분기에 연봉계약만큼의 월급을 받을 수 있으나, 매출목표가 미달하면 기본급여에 해당하는 40%만 받게 되는 구조였다.
처음 합류한 세일즈맨의 첫 분기 월급은 Non Incentive program으로 계약연봉의 60% 를 지급하기에 부여받은 매출목표 달성의 꿈을 꾸며 첫 분기의 세일즈를 시작했다.
부여받은 매출목표는 분기 9억.
대전이하 영남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총판점 구축을 통한 유통영업이 나의 세일즈 임무였다. 마침 삼보컴퓨터 시절 파트너사였던 대표님이 총판점을 희망하셨고 리셀러 구축과 판촉프로모션 기획까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부산의 C호텔 연회장을 빌려 Lenovo Korea 대표님까지 모시고 총판점 오픈 세리머니 디너 세미나를 나름 성대하게 진행하였다. 대표님께서 매우 흡족해하셨다.
☞충성고객은 하나 둘 줄어들고
IBM 노트북은 철저하게 비즈니스 노트북 컨셉을 고수해 왔기에 '애플빠' 와 유사한 IBM Thinkpad 매니아층이 존재했다. 올 블랙 바디에, 블랙 키보드 자판 중간에 자리 잡은 Red dot 키가 포인트인 Thinkpad는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구분이 가능하였고 기업용 노트북으로는 기능이나 내구성에서 손색이 없는 제품이었다. 특히 보안기능이나 충격흡수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제품이었다.
그러나, 국내 노트북 사용자의 취향은 Thinkpad의 컨셉과는 정반대로 달려가고 있었다. 사이즈는 작아지고, 두께는 얇아지고, 색상은 밝아지고...
부산의 전자제품 상가의 리셀러 매장 이십여 군데에 제품을 진열하고 실판매 확대를 촉진하는 이벤트를 한 달간 벌였으나 기대이하로 판매는 부진하였다.
소비자의 노트북 선택 기준이 빠르게 변화했고 소수의 Thinkpad 매니아층에서만 구매가 일어났다.
재고는 쌓여가고, 월 매출 3억은 달성해야 다음 분기의 월급이 제대로 나오는데 절반도 못하고 반기가 지나갔다. 매월 40%의 월급은 겨우 4인가구의 기본적인 생활만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적금불입은커녕 있던 적금을 깨어서 생활해야 할 지경이었다.
☞유통영업은 브랜드 파워에 달려있다
삼성과 엘지의 노트북 마케팅은 더욱 정교하게 구매자의 눈길을 자극하며 외관은 더욱 화사하고 모던하게, 보여지는 것을 강조하는 광고와 아기자기한 옵션과 사은품을 더하며 대학생과 직장 초년생의 노트북 구매심리를 통째로 몰아가고 있었다.
TV광고도 없고, 카탈로그도 제품도 모두 기업용 노트북 컨셉에 충실한 Thinkpad 브랜드의 힘은 점점 약해지고 우리 회사의 기라성 같은 세일즈맨들의 세일즈 스킬이나 파워는 더 이상 먹혀들지 않고 있었다.
유통영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소비자의 제품 선호도를 충족하는 제품이 필수이며, 소비자의 구매결정 준거를 제시하고 형성해 가는 누적된 광고홍보 마케팅의 힘에 의해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기에 한 때 B2B 세일즈에서 전설 같은 실적을 달성했던 나의 유통매출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외국계 기업의 특성상 한국지사에 부여된 총예산은 연간 총매출목표를 중심으로 최소한의 비율로 총액이 책정되고 그 안에서 지사장(한국지사 대표)의 전략과 권한으로 인건비, 사무실 유지 및 일반경비, 판촉비 및 기타 경비까지 통제되고 지출하기에 당시 상황에서 Lenovo Thinkpad 브랜드 마케팅은 불가능했다.
일 년간 세일즈다운 세일즈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총판점도 해지하고 Lenovo 세일즈도 정리했다. 그만두고 나오는 날에 남아있던 직원들에게 잘 지내시라는 간단한 인사만 남긴 채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송별식도, 직원들과 식사도 없었음은 이미 하나둘씩 Lenovo 둥지를 떠나고 있었기에 자연스러웠다.
세일즈맨은 실적으로 말한다!
매출목표는 지상최대의 과제이며, 세일즈맨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성취를 위해 스스로 불사를 줄 알아야 한다.
끊임없이 시장을 읽고,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고, 효용과 가치를 개인화된 업무영역의 솔루션까지 제시할 수 있는 consultative selling spirit과 능력을 발휘할 때 실적은 달성된다. 적어도 B2B Direct 시장에서는 세일즈맨의 능력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하다.
그러나 B2C 시장에서 판매기업은 Mass marketing과 Customized marketing을 위한 자본투입으로 브랜드 파워를 만들어 줄 책임이 있다. 멀어져 가는 유통시장 내 B2C고객들에게 뛰어난 세일즈맨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Lenovo 세일즈에서 마케팅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뼈저리게 배웠다.
{세일즈 리더에게 바란다}
1. 세일즈 목표는 브랜드 파워에 맞게 설정하라. 무리한 목표는 유능한 세일즈맨을 무능하게 만들 수 있다.
2. 세일즈 성과는 세일즈맨의 능력 이면에 브랜드 파워로 인한 성과창출 포션이 있음을 잊지 마라. 가능하면 계량화하여 세일즈 능력과 브랜드로 인한 효과를 구분하여 세일즈맨을 평가하라.
3. 전권을 쥐고 있는 리더라면 세일즈맨의 수를 무작정 늘리지 마라. 세일즈맨은 로봇이나 소모품이 아니다. 세일즈맨이 달성할 수 없는 매출목표를 할당하는 것은 죄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