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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작 Jun 04. 2023

소설 위대한 개츠비, 끝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침서



<위대한 개츠비>, 책의 제목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비교적 최근, 2013년 개봉작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개츠비 役으로 출연한 바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이 한몫을 하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와 영화 <위대한 개츠비>



그러기 전에 이 소설은 당대 미국 최고의 고전 소설로 꼽히고 시간이 많이 흐른 아직까지도 전 세계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소설이다. 영화를 원작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보다 전 세계적으로 소설 자체 팬이 훨씬 많다.


이 소설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후 1920년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경제적, 물질적으로는 부유하고 풍요로워진 미국이지만 그 속에서 인정 없이 메말라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비판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20세기 초, 미국은 '아메리칸드림'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제가 호황 하면서 재즈 음악이 성행했고 대규모 파티가 즐비했으며 금주법이 시행되던 때였다. 하지만 금주법은 이미 환락에 길들여진 젊은이들에게는 금방이라도 허물 수 있는 바리케이드에 불과했다. 다양한 방법으로 밀주를 주고받는 일이 많았으며 '막으면 더 한다'라는 말이 있지 않나, 오히려 음주가 더 성행했었다고 한다.



플래퍼, 금주법, 아메리칸드림



책의 저자 스콧 피츠 제럴드는 딱 동시대를 살아가던 젊은이였다. 그가 1925년에 이 책을 완성한 것으로 보아, 그가 느낀 미국의 현실과 점점 불투명해져가는 젊은이들의 사랑, 또는 미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난해서 사랑에 실패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소설 속 개츠비에 투영, 여주인공인 데이지에도 그의 첫사랑을 담아 이야기를 펴냈다는 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스콧 피츠 제럴드와 그의 첫사랑 지네브라 킹



이기주의가 만연한 시대의 사회적 혼란과 인간의 방황을 다룬다는 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 노르웨이의 숲>과 닮아있다. 내가 <위대한 개츠비>를 읽게 된 이유는 바로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나서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 속에서 스콧 피츠 제럴드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를 소설 속 등장인물의 목소리로 자주 언급한다. 예를 들어 "위대한 개츠비를 몇 번이고 읽은 사람과는 언제든지 친구가 될 수 있다"라는 류의 말까지 언급할 정도로 경외심을 드러낸다.



<위대한 개츠비>와 <노르웨이의 숲>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결을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작가가 우상으로 삼을 만한 작가의 작품은 또 어떤 작품일까?라는 호기심에 이 책을 찾아 읽었던 것 같다.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도 <위대한 개츠비>가 1920년대 미국 사회를 비판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1960년대 일본을 비판함과 동시에 일본이 나아가야 할 미래를 제시해 주는 소설이다. 당시의 사회 현상과 혼란, 이로 인해 인간들이 겪는 아픔까지 나타내었고 아울러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가에 관한 교훈을 주는 소설들이란 점에서 두 소설은 결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소설 속에는 주인공 개츠비, 화자가 되는 닉 캐러웨이, 톰 뷰캐넌, 데이지, 베이커, 윌슨, 머틀 등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주인공들이 각자 갖고 있는 가치관이며 성향 등을 상반되게 설정함으로써 개개인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고,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게끔 이야기를 배치했다고 생각한다.



줄거리


소설에서 닉 캐러웨이는 종종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하는 화자가 된다.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서부에서 온 닉은 부유한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청년이다. 직업 때문에 동부에 있는 웨스트 에그 섬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곳에서 거대한 별장의 주인인 개츠비라는 이웃 남자를 만나게 된다. 개츠비는 자신의 저택에서 매주 주말마다 성대한 파티를 여는 인물이다.


개츠비의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소문만 무성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를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떠들어대면서도 개츠비가 주최한 성대한 파티에서 음주 가무를 하고 그 파티에 늘 끼고 싶어 한다. 반면 닉 캐러웨이는 떠도는 소문에 개츠비를 가끔 의심하기도 하지만 쉽게 평가하지 않는다. 더불어 남들과는 다르게 개츠비를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보려 하지 않고 자신이 바라보는 대로 직시하려고 노력한다.  


닉 캐러웨이는 이웃 남자 개츠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고 개츠비의 화려한 파티에 관한 진상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개츠비가 과거에 사랑한 여인 데이지와 재회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개츠비에겐 가난했던 시절 부잣집 여인 데이지와 헤어져야만 했던 상처가 있었다. 이후 부정한 방법으로 밀주 거래를 통해 부를 축적하게 된 개츠비는 늦게나마 그녀를 되찾고 싶어 한다.


데이지와 7촌 관계였던 닉은 개츠비와 데이지를 만나게 해준다. 하지만 이미 데이지에게는 개츠비와 헤어졌던 직후 만났던 톰 뷰캐넌이라는 남편이 있었다. 톰은 데이지처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란 남자다. 청년 때 스포츠 선수로서 활동하며 형성된 우람한 체격을 자랑하기도 하고 이외에 가진 부를 포함한 많은 것들을 과시하는 전형적인 물질만능주의 인간이다. 톰은 심지어 인종차별 발언을 서슴없이 일삼는, 우생학을 공부하는 비열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개츠비를 무시하며 자신이 가진 재산으로 어떤 여자든 넘어올 수 있다는 거만한 태도를 지닌 걸로 보아 무시하는 행동이 기본으로 깔린 인물이다. 동네 정비소 윌슨의 아내 머틀과 바람을 피우면서도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어떤 이유에서건 결국 자신에게 올 것이라는 떳떳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씁쓸하게도, 톰의 저질스러운 거만함대로 데이지는 개츠비의 순정을 저버린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던 수많은 시간들을 한순간 무너뜨리고 만다. 개츠비와 데이지 두 사람의 과거가 밝혀지는 순간에도 톰은, 두렵지 않다는 태도로 일관한다. 잠시나마 사랑의 도피를 꿈꾼 개츠비였지만 흥분한 데이지가 운전하는 차에 그만 톰의 내연녀 머틀이 치여 죽는 상황이 발생하며 이야기의 끝은 파멸로 다다른다.


톰은 머틀의 남편 윌슨에게 당신 부인을 치어 죽인 노란 차의 운전수는 개츠비라며 거짓된 폭로를 한다. 이에 윌슨은 총을 들고 개츠비를 찾아가 개츠비를 쏘고 자신도 자살한다. 이런 상황에서 데이지는 개츠비의 장례식도 가지 않고 톰과 여행을 떠나고 닉은 외롭고 쓸쓸하게 죽은 개츠비의 장례식을 더는 불행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개츠비와 연결된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해 장례식에 오게끔 노력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개츠비의 파티에는 무조건적으로 참가했던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닉은 이제 개츠비는 죽었으니 사업적으로도 연결될 일이 없다는 식으로 거절한 울프심이라는 작자의 말에 놀라고 연달아 톰과 데이지가 여행을 떠난 어이없는 상황을 바라보며 동부 사회에서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허탈함과 동시에 사람에 대한 환멸감,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기대 등의 덧없다는 감정을 느낀다.


이 일을 계기로 겉보기만 화려한 동부 사회에서의 꿈은 접어두기로 하고 닉은 다시 그가 있던 곳인 서부로 돌아가려는 결심을 하고 소설은 끝이 난다.



                                                           

                          개츠비는 위대한가?



이 책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는 대개 '개츠비는 위대한가?', '위대하다면 왜 위대한지, 위대하지 않다면 어째서 위대하지 않은지'로 갈린다. 난 솔직히 이 책을 다 읽고 주인공 개츠비는 왜 위대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사실 지금도 조금 그러하다. 개츠비는 정말로 데이지를 너무 사랑했던 것일까라는 질문도 생겨났다. 책을 읽고 개츠비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갈릴 수 있나? 싶어 여러 글을 읽어보기도 했다. 책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른 거고 정답은 없으니까, 같은 것에 대한 여러 의견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딘지 유용한 일인 것 같다.


 결론은 '개츠비는 위대하지 않다'쪽의 의견이다. 내가 느끼는 바 개츠비는 '사랑하는 여인을 갖지 못한 과거와 그때의 힘없던 자신의 모습에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가졌던 젊은 날의 순정은 이제 소용이 없어졌는데도 말이다. 데이지는 재회한 개츠비를 온전히 택하지 않았고 개츠비가 죽었음에도 톰과 여행을 떠나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개츠비는 과거를 좇으면서 현실은 마주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진정 데이지를 사랑한 것이 아닌, 자신의 부를 통해 이룰 수 있게 된 사실들을 사랑한 것이 아닐까?


이런 모습은 그의 아버지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개츠비의 아버지는 아들의 장례식에 와서 닉에게 꾸깃꾸깃해진 사진을 한 장 보여준다. 아들의 장례식에 와서도 아들이 죽은 '현재'를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꾸깃 해진 사진(성대한 저택=개츠비의 부)을 남에게 자랑한다. 계획표대로 열심히 살았던 위대했던 아들의 모습만을 회상하면서.


과거에 머물러 있는 개츠비의 아버지


겉으로 보기에 개츠비에겐 지고지순한 순정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잃어버린 시간과 자신을 되찾기 위함이 그의 순정이었을까, '지난날의 사랑을 되찾기 위함'이라는 미명 아래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던 시절 또한 합리화했던 것 같기도 하다. 개츠비 자신이 만든 상처에 헤어 나오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


성대한 저택, 잘 차려입은 양복, 화려한 파티..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모든 것이 공허했던 개츠비.


개츠비에게 남은 것은 없다. 죽음만이 그를 맞이했다. <위대한 개츠비> 속의 '위대한'이라는 형용사가 왜인지 반어법으로 느껴진다.


동부의 화려함, 개츠비라는 신비로운 남자, 지고지순한 사랑, 그리고 순정... 모든 것이 허물뿐이다. 까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결코 위대하지 못했던 개츠비의 이야기



판단을 보류한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소설의 첫 부분에 적힌 "판단을 보류한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이다. 이 말은 닉 캐러웨이가 한 말이다.


사람들은 거대한 개츠비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되고 싶어 하면서도 뒤편에서는 개츠비의 실체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험담을 늘어놓는다. 개츠비의 파티에는 참가하면서 그의 장례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사치스러운 것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속하고 싶어 했던 물질만능주의 시대상과 그 온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오히려 나는 닉 캐러웨이라는 인물을 위대하게 평가한다. 적어도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볼 줄 아는, 판단을 보류할 줄 아는 사람으로 등장하니까. 그래서인지 작가 스콧 피츠 제럴드가 미국인이 이상향으로 삼아야 할 존재를 닉 캐러웨이로 그려냈다는 것에 더 부합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닉은 다른 사람들이 증거 없이 퍼뜨리는 루머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중립적인 인간으로 표현됐다. 개츠비, 톰, 데이지의 사이에서도 처음에는 제3자의 입장으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관망하고자 노력하는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당시 미국 동부 사회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닮고 배워가야 할 이상향으로 닉 캐러웨이를 내세운 것 같기도 하다. 어느 것에도 휘둘리지 않고 지조가 있으면서 자신이 바라보는 그대로에 대한 평가가 옳다고 믿을 수 있는, 가볍지 않은 사람의 표본


대비되는 인물로 톰 뷰캐넌은 백인 우월주의에 찌든, 인종차별을 일삼고 우생학을 연구하는 저질스러운 인물로 등장한다. 존재를 멋대로 평가하는 자기 관점이 중심인 이기주의 인간. 닉 캐러웨이가 스콧 피츠 제럴드가 설정한 이상향이 아니었을까라고 한다면, 톰 뷰캐넌이란 인물은 그가 비판하려 했던 1920년대 인정 없는 미국 사회가 그 자체가 아닐까?


다시 언급해서, 닉의 대사 "판단을 보류한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문장은 늘 내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시해야 할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부분.


치우친 편향적인 생각들, 또는 누군가를 평가할 때 자연스럽게 머릿속을 차지하게 되는 일반화의 경향 등..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오류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만이 옳은 것이 아닌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러지 말자고 되뇌어도 같은 실수를 항상 저지르고 만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말, 중요하다. 물질주의, 이기주의가 문명이라는 좋은 것을 집어삼키고 사람을 변질시켜 온 것은 그리 가깝지만은 않은, 꽤 오래전부터 생겨왔던 일이라는 것을 오래된 소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스콧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그렇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서도 이런 무슨 무슨 주의들을 비방하는 자세를 취하니까 말이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개츠비라는 남자는 그저 제물이 되어 바쳐진 것 같다. 씁쓸하지만, 그러면서도... 개츠비를 통해 사회를 비판하고 똑같은 과오를 반복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주기도 하는 것 같고.


개츠비의 장례식이 쓸쓸하지 않게 사람들을 초대하려고 노력했던 닉 캐러웨이의 모습이 참 인상 깊다. 혼란한 사회 속에서도 이런 사람이 더 많아야 하고 이런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를 읽고 궁금증이 생겨 읽어본 고전소설 <위대한 개츠비>...


어떤 이들은 문체가 수려하고 섬세해서 최고의 소설로 손꼽기도 하고, 개츠비라는 남자의 위대함에 감동하는 소설이라고도 평가한다. 과연, 미국 최고의 고전 소설로 꼽힐 만한 책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그 시대 미국을 살던, 그 상황을 겪어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책을 읽고 난 뒤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갖고 있는 평가에 대해 100프로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한 시대를 책으로 서술하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그 시대가 나아가야 하는 이상향을 제시하는 소설은 역사 그대로의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 가치는 아마 몇 해가 지나도 그 시대와 전혀 관계없던 사람들에게 지침서의 역할이 되기도 한다. 이미 흘러버린 지난 시간을 반성하기도 하고, 또는 다시 우리 사회에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역할로써 말이다.


소설에서 끝맺음을 함께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독자들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으로 많이들 꼽는 구절이다.


우리는 모두 자칫하면 다시 잘못했던 과거로 돌아갈 여지를 갖고 살아간다. 어느 날은 과거로 떠밀려 내려가 잘못을 반복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과정은 전부 과정 속의 과도기일 뿐, 결국 목적지는 정해져 있고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해 나간다. 좁은 범위에서는 개인의 과도기, 큰 범위에서는 사회의 과도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고전 문학이지만,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욱 더 새겨두어야 할 책.


그런 점에서 책 <위대한 개츠비>가 가진 가치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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