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 일상과 일탈 사이
한달살이 하겠다고 제주로 입도하고 2주가 지나 육지 나갈 일이 생겼다. 한창 휴가철이라 공항에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김포로 가는 비행기에는 빈자리 없이 승객들로 가득 찼다. 1시간이 조금 넘는 애매한 비행시간 동안 아내가 추천해준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유선사)>을 읽었다. 재미있는 에세이들이지만 김포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다 읽지는 못했다. 글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글쓰기 싫은 온갖 핑계를 나열하는데, 대부분은 일상과 일탈 사이 불안의 외줄 타기였다.
어렵게 시작한 제주살이 도중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이유는 면접 탓이었다. 먹고사는 일은 숭고한 일이다. 제주에서 보내는 동안만이라도 앞일 걱정 없지 지내리라 다짐했지만, 역시 계약 만료로 백수가 된 마당에 한 달 뒤 먹고살 궁리를 안 할 수는 없었다. 마침 기회가 있어 지원한 곳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먹고 살려는 버둥거림은 꼴사나울 지언정 숭고한 일이라는 어느 영화 속 대사가 떠올랐다.
사실 제주로 입도하기 열흘 전, OO공사 공개채용에 지원해 면접까지 보고 왔었다. 최종 결과는 제주살이 첫 주에 발표 예정이었다. 만약 합격하게 되면 제주살이를 포기하고 돌아가야 했다. 결과는 불합격. 쓰라린 실패에 마음이 쪼그라들었지만,
"제주살이를 그만두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야."
나는 아내에게 별 일 아닌 듯 담담하게 얘기했다. 아쉬움이 섞인 다행이랄까?
취업 성공을 위해 내 딴에는 치열하게 준비했는데 이런 결과를 얻는다면 보통은
'심사자의 눈에는 부족해 보였거나 더 절실한 후보자가 되었을 거야.'
하고 스스로 위로한다. 그리고 낙방으로 인한 상실감을 줄여보겠다는 핑계로 나름 실패의 원인을 찾아본다. 근대 매번 '결국 내 노력과 정성의 부족한 탓'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서운한 마음이 사라지기는커녕 '한심한 인간'하고 자기 비하로 끝맺는다.
불합격의 상실감은 의외로 다음 날에 사라졌다. 딴생각 못 할 정도로 무덥기도 했지만,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마음속으로 새로운 감정들을 불러 들였다. 그 덕분일까. 보름 만에 다시 면접 보러 육지행이다. 이미 시간이 지났으니 하는 얘기지만, 급하게 잡힌 면접 일정으로 부랴부랴 비행기 예약하고 난리를 쳤는데, 그 면접도 역시나 망했다. 며칠 뒤 결과 통보로 제주 한달살이 끝날까지 백수 신분 유지를 확정받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제주에서 나가지 않고 이 생활을 즐기는데 집중할 걸 그랬다. 뭐, '그때 그 주식을 샀어야 했는데...' 같은 무의미한 생각이지만...
그리고 지금, 9월. 대전 모처에서 연수연구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밥줄이 일 년 연장된 셈이다. 제주에서의 생활은 환상 속 일처럼 아득해져 버렸다. 아침에 지저귀는 참새 소리와 이웃의 고양이, 파란 하늘과 짙은 바다 대신, 복잡한 출근길과 지친 퇴근길이 일상이 될 것이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제주에 있는 동안 마음이라도 덜 고달팠을 텐데.... 지금은 새 일터에 적응하랴, 이사하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이제 갓 한 달이 지난 제주살이는 이제 낡을 일만 남은 추억이 되어 버렸다.
치열한 삶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지만, 치열하지 않으면 살아남기조차 힘든 세상이다. 그럴수록 제주도 푸른 바다와 한적한 카페가 그리워질 것이다. 그리고 제주의 어떤 날이 유난히 그리운 그날이 오면 문득 다시 그곳을 찾기를 희망한다. 이 땅의 모든 숭고한 이들에게 덜 상처받고, 더 빨리 회복하길 기원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우리처럼 치유의 시간을 갖길 희망한다. 누구든 어제보다 내일이 더 행복할 수 있는 오늘을 살 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