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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주 Aug 15. 2022

빗길 오름행

제주살이 - 16일 차

전날 (7월 15일) 하루 종일 날씨가 흐리더니, 아침 아홉 시가 조금 넘어 많은 비가 쏟아졌다. 비가 조금 잦아든 틈을 타 한경면 저지리에 위치한 책방 소리소문를 찾았다. 제주도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독립서점인데, 세련된 판매전략에 넘어가 세 권이나 책을 샀다. 아내는 이곳의 베스트셀러 1위에 빛나는 블라인드 북 (노란 봉투로 포장돼서 구매 후 열어봐야만 자신이 무슨 책을 산지 알게 되는 무작위형 판매전력)을, 나는 베스트셀러 2위의 리커버 북 (똑같은 구성에 포장지만 추가해 한정판에 열광하는 구매자의 욕구를 자극하는 전략) 버전의 <변신 (프란츠 카프카, 홍성광 옮김, 열린책들)>을 샀다. 아내는 추가로 제주도 오름의 트래킹 코스를 소개한 <오름오름 트래킹맵 (박선정 지음, minimum)>을 샀다. 


마지막에 구입한 오름 트래킹 책 때문일까? 점심을 먹고 가까운 오름에 도전하기로 했다. 한라산 등반은 너무 본격적이라 부담이었는데, 작은 오름은 해볼 만 하다고 생각했다. 식당 근처에는 금오름, 저지오름, 문도지 오름, 금악오름 등등 많은 오름이 있었다. 그 가운데 거리도 가깝고 오르기 쉽다는 저지오름을 선택했다. 한경면 저지리에 위치한 해발 고도 239m, 둘레가 800m 인 깔때기 모양 분화구를 갖고 있는 오름이었다. 원래는 초가지붕을 엮을 때 쓰이는 새(여러 해 살이 풀, 제주도 말로 '띠')가 자랐는데, 주민들이 손수 나무를 심어 지금은 닥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숲이 되었다고 한다.


저지오름 코스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점심 이후 흐리기만 할 뿐 비는 내리지 않았다. 오전에 내린 비로 오름길이 젖은 숲 향기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았다. 오름에 조성된 길은 아래쪽으로 저지오름 둘레길(1.6 km)이, 정상에는 분화구로 내려가는 분화구관찰로와 분화구를 따라 도는 정상둘레길(800 m)로 구성된다. 그리고 저지오름 둘레길과 정상둘레길을 연결하는 길이 있다. 올라가는 길은 공동 묘지 쪽과 야외 생태 학습장 쪽의 두 방향이 있는데, 하필이면 더 멀리 돌아가는 야외 생태 학습장에서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정상둘레길로 올라가는 길이 나올 때까지 아래쪽 둘레길을 따라 즐거운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서늘한 기온과 적당한 바람에 상쾌했다.


갓 출발했을 때까지만 해도 촉촉한 올레길이었건만...


한참 저지오름 둘레길을 따라가고 있을 무렵, 부슬부슬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다시 시작되려나? 우산도 없는데 큰 일이다. 되돌아 내려가기에 이미 많은 길을 왔다. 그럼에도 지금 돌아간다면 비에 쫄딱 젖는 일만은 피할 수 있다.

 

"길은 더 미끄럽고 위험할 텐데, 그만 돌아갈까?"


아내를 설득했다. 그러나 아내는 아쉬워하는 눈치다.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도 빗방울은 조금씩 더 굵어지고 있었다. 어떡하지?


가능하다면, 비에 젖고 싶지 않았다. 이미 얘기했지만, 습기에 약한 종이인형이기도 했고 비에 쫄딱 맞아 찝찝한 기분은 피하고 싶었다. 특히 미끄러운 길이 위험했고 젖은 옷 때문에 감기에 걸릴까도 걱정되었다. 그런데 아내는 되돌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빗길 오름길을 반기는 분위기다. 우리는 길 가 무성한 나무 아래 비를 피해 섰고, 그녀를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우리의 제주살이 상황과 지금 순간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대책 없이 끝나버린 계약으로 지금은 백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동안 찾은 이곳, 제주도. 언제나 그렇듯 인생길은 꽃길도 있고, 비바람 부는 거친 길도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때마다 그만 갈까 쉬어갈까를 고민하며 주저하고 있던 게 아닐까? 이번 제주살이도 내 삶에 닥친 겨울을 이겨내기 전의 쉼이자, 진로를 고민해보는 시간으로 온 것인데, 장상도 못 본 체 비바람에 물러서야 할까? 그러다, 어쩌면 체념에 가까운 생각이 스쳤다. 

'조금 젖는 것뿐이잖아?'

우리는 굵어진 빗줄기에도 맨몸으로 정상을 오르기로 했다. 가는 길 내내 주변으로 시끄러운 빗소리만 채우고 있었다. 척척하게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걸음을 더디게 했다. 우리는 말없이 정상을 향해 걸었다. 


 "학교 다닐 때 비 맞으면서 걸은 적 없어? 나는 몇 번 있는데"


저지오름 정상에 도달할 때쯤 아내가 말했다. 군 생활을 하면서 땀에 젖어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비에 쫄딱 젖을 일은 없었다. 비가 오면 빗물이 닿지 않는 건물 안이나 처마 끝에서 비를 보며 기다리곤 했다. 그렇게 비를 바라보는 건 좋았지만, 온몸으로 맞이할 생각은 왜 못했을까? 아내는 학교 다닐 적에 맛본 비에 맞는 낭만을 내게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도착한 저지 오름 정상에는 전망대가 있었지만 비안개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를 피할 수도 없었던 전망대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설이 되어 버렸다. 이미 쫄딱 젖은 상태로 타박타박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 젖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비는 오름을 다 내려올때까지 계속 되었다. 비에 젖어 돌아가는 길은 찝찝했지만, 목표했던 정상에 도착했다는 마음에 조금 뿌듯해졌다. 아내 역시 원하는 빗길을 마음껏 걸었으니 만족했을 것이다. 함께라서 다행이다. 빗길로 미끄러워진 길에 아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가끔은 근사한 결실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며


빗길 산행은 마음을 조금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연약한 마음이 조금 단련이 된 것도 같다. 아마 산행을 포기하고 돌아갔어도 너그럽게 "좋은 시도"라 평가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런 건 이제 그만 쌓고 싶다. 지난주 지원했던 회사에서 최종 탈락했다. 비바람에 성공한 완주 덕분일까, 마음이 금세 다잡아 졌다. 빗길 산행 같은 도전이 두 번, 세 번 이어가다 보면 어느새 "결실"이 찾아 올거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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