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 우리의 고민
제주 한경면의 매력은 단연 낭만과 감성이다. 특히 제주의 독립서점은 대형 서점과는 다른 특색 넘치는 감성 매력의 한 축이다. 동네 작은 '책방'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요즘, 제주 한경면의 아기자기한 '책방' 방문은 추천 여행코스이다.
우리는 제주에서 세 군데의 독립서점과 한 곳의 북카페를 찾았다. 처음으로 찾은 서점은 이층에 위치한 아기자기한 무명서점 (한경면 고산리)이었다. 아내는 그곳에서 '제주에서 무엇을 먹었냐 하면요' (글/그림 시와)와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유선사) 두 권을 샀다. 두 번째로 방문한 서점은 책방 소리소문 (한경면 저지리)이었다. 카페 같은 매력적인 인테리어와 수려한 판매전략에 넘어가 책 3권을 사버렸다. 서점은 아니지만 갈 때마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북카페 유람위드북스(한경면 조수리)는 이 지역 핫플레이스로 방문을 추천 하는 곳이다. 빼곡하게 들어찬 책들과 고양이들, 그리고 친절하고 조용한 카페는 주변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서점 섬타임즈 (제주시 애월읍 소길 1길 15)에 방문한 건 책이 아닌 '마흔 너머' 행사 때문이었다. 서점 주인인 이애경 작가님이 준비한 '마흔 너머'는 말 그대로 마흔을 넘긴 3인의 작가(전직 기자 현 서점 주인장 이애경 님을 비롯해 소설가 한지혜 님 그리고 영화 기획자 서정 님)가 모여 "어른이 되는 것"을 주제로 이야기 나누는 행사였다. 나도 마침 올해로 만 40이 되는데, 지금껏 잘 살아온 건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리고 그 질문이 나를 제주로 이끌었다. 때마침 남의 마흔 살이를 들어 볼 좋은 기회가 생겼다. 전혀 다른 삶을 산, 나보다 '어른'인 선배들의 인생 이야기를 참고해 '앞으로 삶에 대한' 조언을 얻고 싶었다. 과연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했다.
7월 19일 오후 5시, 소박한 서점은 우리를 포함한 참석자로 채워졌고,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았다. 대신 사람 수에 맞게 의자가 준비된 작은 행사장이 되었다. 세 사람의 이야기는 그녀들이 만났던 고등학교 때를 시작으로 10년 단위로 지금의 50대까지 각자의 삶과 삶을 바라보는 입장을 이야기했다. 세 사람은 나름의 성공시대와 힘든 시절, 그리고 위기를 극복해 온 인생사를 담담하게 풀어갔다. 친구의 입장에서 한창 잘 나가던 그 시절이 당사자에게는 미치도록 힘든 시기였다는 고백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 안에서 어른스러움이 무엇인지 전하려 한 것 같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사실 그녀들도 아직 어른과 아이 사이 어디쯤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나보다는 더 근사한 어른에 가깝지만.
두 시간 남짓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참석자들과 소담한 대담도 있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고민으로 이곳을 찾은 이도 있었고, 힘든 시기를 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쉽게 꺼내기 힘든 이야기들도 나누면서, '어른'의 정체나 성찰보다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삶의 위기에 대해 더 집중한 듯했다. 그 위기를 슬기롭게 건너길 바라는 마음의 조언과 응원이 이어졌다. 나처럼 미래와 걱정으로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작은 위로가 되었다.
행사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는 많이 기울어진 태양과 오렌지빛 노을 진 하늘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그 길 차 안에서 문득 든 생각이 있다.
'어쩌면 어른은 성인(聖人), 보살, 군자 같은 이상적인 인간상의 현대 버전이 아닐까?'
사실 우리 모두는 멋진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가 아닐까. 모두가 어른이라는 존재가 되길 선망하면서도 닿을 수 없는 지점을 향해 끝없이 쫓고 있는 게 아닐까? 마치 지금 우리가 황금빛 노을을 향해 달리지만 결국 닿을 수 없는 환상이 아닐까? 정작 어른이 되어버리는 것보다, 위기와 역경을 넘으면서 꾸준히 그리고 조금씩 어른에 가까워지는게 아닐까?
어른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심지어 각자 다른 어른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는 건 '성인'이 되는 만큼 어려운 일 같다. 그녀들의 짧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여전히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더 힘내야겠다'는 에너지와 긍정의 응원을 받아 충분히 만족스럽다. 역시 그녀들의 삶이 아닌 나의 삶에서 스스로 찾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