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4월 24일 (전날 짙은 황사, 오후부터 맑음)
늦은 저녁, 지하철역에서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 시간까지 야근을 한 듯 지친 기색이 역력한 30대 초반의 남자가 먼발치에 서 있고,
2~3학년으로 보이는 여대생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서서는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다.
하릴없이 기다리던 참이 지루해, 고개를 돌러보던 모습이 그러했다.
오래지 않아, 계단을 올라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 보였다.
어려 보여 중학생인가 하다가 이 시간에 다니는 거라면 고등학생인가 싶기도 했다.
책가방을 짊어진 그 학생 손에는 작은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지하철 역사로 들어오던 그 소녀는 지친 직장인 앞에 서더니 손에 든 종이 가방을 열어 보이며 말을 걸었다.
너무 멀어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알 수 없었다.
지친 탓이었을까, 그는 시종일관 무심한 표정이었고,
끝내 한 손을 들어 흔들며 차가운 거부를 표시했다.
소녀는 멋쩍은 듯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노래를 듣고 있는 여대생 옆에 서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붙이며 종이 가방을 열어 보였다.
그러나 여대생은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음악에 열중할 뿐이었다.
바닥으로 향한 여대생의 고개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녀는 얼마지 않아 포기한 듯 종이 가방을 접고 걸음을 옮겼다.
그다음이 내 차례임을 직감했다.
내심 그녀의 종이 가방 안에 든 것과 두 사람에게 전한 얘기가 몹시 궁금했지만,
호기심을 숨긴 채 최대한 무관심해 보이도록 기둥에 기대서 있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소녀를 혼신의 연기력으로 의식하지 않는 척했다.
내 앞까지 당도한 그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종이 가방을 열어 보이며 말했다.
"어렵게 지내는 독고노인들 돕는 봉사하고 있습니다.
양말 하나 사주시면 수익금으로 어려운 어르신들 돕고 있어요. 좀 도와주세요."
아! 두 사람의 냉소와 애써 드러낸 무관심이 단숨에 이해됐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 일었던 생각이 저들에게도 떠올랐을 것이다.
'도와준다고 건넨 돈이 정말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이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 핑계로 낸 돈이 엉뚱한 일에 쓰일지도 모르잖아?'
그러나, 그런 생각을 했다는 마음에 죄책감이 따랐다. 정말 선한 의지로 하는 봉사활동 일 수도 있잖아?
나는 소녀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종이 가방 안에는 남성용, 여성용, 공용의 세 종류 양말이 두어 켤레 담겨 있었다.
나는 공용 하나 달라고 말하고 얼마냐고 물었다.
"모금식으로 받는 거라 도와주시고 싶은 만큼 적당히 주세요."
소녀의 대답에 나는, 그런 말이 더 무섭다며 지갑을 꺼냈다.
양말하나면 얼마려나? 지갑에는 천 원과 만 원 지폐가 한 장씩 들어있었다. 차마 만원을 낼 수는 없다 싶어, 천 원을 내밀었다. 그러다 이내, 아무리 양말 한 장이라지만 천 원은 너무했다 싶어 주머니를 뒤졌다. 마침 오백 원 짜기 동전 몇 개가 더 있길래 모두 털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독고노인 돕는데 쓰겠습니다. "
마침 양말이 필요했는데 차라리 잘 되었다.
소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또 다른 누구 앞에서 종이가방을 내보일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미처 보기도 전에, 방금 도착한 열차를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