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영주 Nov 25. 2023

금연의 결심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한 겨울 아침 등굣길에 길게 내뿜는 입김이 담배연기 같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남자아이들이라면 한 번쯤 어른이라도 된 듯 길게 입김을 뿜어보곤 했다. 하얀 연기을 뱉어 내는 담배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근사한 어른이자 아빠의 상징이었다. 하루는 친구가 아빠 몰래 훔쳐 나왔다면 우리들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내밀었다. 그 친구를 포함한 우리 넷은 사람 눈길을 피해 짓던 중이던 건물 공사장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개비를 채 피우지 못하고, 콜록 대며 '어른 들는 왜 이런 걸 피는 걸까?' 의아해하며 헤어졌다. 


당시 우리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셨다. 정작 본인은 담배를 피우시면서 나더러

 "너는 이런 거 배우지 마라" 

하셨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지금까지 담배를 사피우는 일은 없었다. 담배뿐 아니라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대부분은 안 하고 살았다. 착한 아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바라던, 이를테면 '커서 공무원을 하거라', '안정적인 선생님도 좋겠다' 혹은 '일찍 결혼해라' 같은 말들도 전혀 따르지 않았다. 태생이 '이거 해라, 저건 하지 말아라'하는 남들 말은 귀담아듣지 않는 "은근히 고집 있는" 아이로 났다. 담배 역시 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어서였을 뿐, <담배 금지>라는 어른들의 교육 덕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껏 노담인생이었던 것도 아니다. 23살 최전방 포병부대에서 군생활하던 때, 부대 친한 사람들 대부분이 흡연자였다. 최전방 부대는 북한과 전쟁이 나면 그들의 진격을 5분 늦추는 총알받이 역할이라고 들었다. 후방 부대의 대비태세를 위한 시간이었다. 그러니, 유능한 인재들은 후방으로 빠지고,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병사들을 최전방 총알받이 자리로 배정된다고 했다. 이 전설 같은 소문이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있던 포병대대에서는 4년제 대학에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천재까지는 아니어도 엄청 똑똑하다는 소릴 들었다. 그래서였는지 부대원 대부분이 소위 골초라 불리는 익연가였다. 작업을 하면서도 담배 핑계로 쉬는 시간을 갖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입대하고 1년이 지난 상병 때쯤이었다. 하루는 일과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막사 주변에서 담배를 태우는 친한 선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담배를 왜 피우는 겁니까? 그렇게 좋습니까?"

내 물음에 자기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말했다.

"피워볼래?" 

궁금하기도 했고, 그 들 무리에 자연스럽게 소속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에 받아 들었다. 그때의 담배는 대단했다. 불을 붙이고 후욱~ 하고 빨아 당기면 2~3초 뒤 머리가 핑하고 돈다. 기분 좋게 술에 취했을 때의 느낌 같았다. 그런 기분이 몇 초 정도 지속되다가 사라졌다. 선임이 얘기했다.

"그 기분에 피우는 거야. 근대, 피우다 보면 약해져서 담배가 늘어."

그렇게 인생 두 번째 경험에서 담배의 맛을 배웠다. 문제는 그 뒤에 몰려온 두통이었다. 두통은 몇 시간을 괴롭혔고, 손가락에 밴 담배 냄새는 비누로 씻어도 가시지 않았다. 그 냄새가 다시 두통을 불러오는  같았다. 고작 담배 한 개비로 얻은 몇 초짜리 상승감과 그 대가로 얻은 몇 시간의 두통은 아무래도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였다. 나는 '담배와 맞지 않는다' 결론 내리고 더 이상 담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아버지의 금연은 그 시절에 시작되었다. 입버릇처럼 '시작도 말라'하시던 아버지도 군대에서 담배를 배우셨다. 아버지가 군복무를 하시던 70년대에는 개인에게 일정량의 담배가 보급되었고, 졸병시절 보급받은 담배는 언제나 선임들에게 뺏기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남 주느니 내가 피고 만다'는 마음에서 시작하셨단다. 그렇게 시작된 담배가 이십 년 가까이 이어졌다. 내가 군대 갈 무렵이 되니 그 시절 생각이 나셨나 보다. 정작 본인은 담배를 피우면서 아들더러 '멀리하라'는 말이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어 보이셨던 거다. 아버지는 내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혼자 살기 시작한 무렵에 금연을 시작하셨다고 했다. 처음에는 많이 힘드셨다는데, 술자리가 특히 어려웠단다. 담배 대신 찾은 사탕 탓에 몸무게가 많이 늘었다고 하셨다. 그런 수고로운 시간을 일 년 정도 참아내시더니, 그 이후부터는 담배 생각도 줄고 훨씬 편안해지셨단다.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금연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하기 힘들다. 다만, 그 정도를 짐작해 볼 만한 이야기가 기억난다. 담배를 하루에 두 갑씩 피우던 대학 선배 준식이 형의 말을 빌리면, "술 끊는 놈 하고는 친구해도, 담배 끊는 놈 하고는 친구 못한단다." 형은 담배 끊기가 웬만한 독기로는 못 끊는다며, 주변의 담배 끊으라는 잔소리에 협박조 핑곗거리로 썼다. 이 선배가 하루는 본인이 지금껏 담배에 쓴 돈을 다 모았다면 차 한 대를 샀을 거라는 얘기도 했다. 참고로 국산 담배 한 갑에 2,500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형은 그렇게 담배값을 아까워했으면서도 끊지 못하고 계속 피워댔다. 


아버지는 그런 담배를 아들이 시작하지도 않은 흡연을 말리려고 담배를 끊으셨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한 척의 값어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